북녘땅 아들 62년간 못 보고 눈 감은 비전향장기수 박희성씨

박고은 기자 2024. 10. 2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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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장기수 박희성 선생이 27일 별세했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3항에 따라 비전향장기수 63명이 북으로 돌아갔지만 선생은 강제전향자로 분류돼 송환 명단에서 빠졌다.

이후 2005년 강제전향 장기수 선생들은 '비전향장기수'로 2차 송환 대상자가 됐지만 선생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장례절차는 '비전향장기수 박희성 선생 시민사회장례위원회' 주최로 진행되며, 빈소는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 207호에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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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희성 선생. 비전향장기수 박희성 선생 시민사회장례위원회 제공

비전향장기수 박희성 선생이 27일 별세했다. 향년 90.

28일 사단법인 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후원회) 얘기를 들어보면, 고인은 전날 오후 5시께 서울 관악구에 있는 ‘만남의 집’에서 소천했다. 사인은 백혈병 합병증으로 인한 부정맥이다. 만남의 집에서 함께 살던 장기수 양원진 선생이 저녁식사를 전달하려 고인의 방에 올라갔다가 숨을 거둔 선생을 발견했다고 한다.

고인은 1935년 3월24일 금광으로 유명한 평안북도 박천군에서 태어났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6살의 나이로 인민군에 자원입대해, 양구전투와 원산전투 등에 투입됐다. 정전협정 뒤 선생은 흥남군관학교에 입교했다가 1957년 제대 후 귀향했으며, 1962년 6월 공작선 기관사로 대남침투공작 중 경기도 화성에서 체포됐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7년 간 복역한 뒤 1988년 12월 장기수 양원진·강담 선생 등과 함께 광주교도소에서 출소했다. 이후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전전했다. 2000년 9월, 63명의 장기수 1차 송환 이후 2001년에 2차 송환을 신청해 북송을 기다렸다.

고인은 28살 때 갓 돌을 넘긴 아들을 북에 두고 남파됐는데, 평생을 고향으로 돌아가 아들을 봐야 한다며 송환을 기다렸다고 한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3항에 따라 비전향장기수 63명이 북으로 돌아갔지만 선생은 강제전향자로 분류돼 송환 명단에서 빠졌다.

송환에서 제외된 이들은 2001년 1월 전주 고백교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강제전향은 전향이 아니다”라며 ‘전향 무효 선언 및 송환 촉구’를 위한 결의를 표명했다. 이후 2005년 강제전향 장기수 선생들은 ‘비전향장기수’로 2차 송환 대상자가 됐지만 선생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박희성 선생의 별세로 33명이던 2차 송환 희망자는 현재 5명만 남았다.

김혜순 후원회 이사장은 한겨레에 “지난주 기력이 너무 없으셔서 병원에 링거를 맞으러 갔다”며 “그날도 아들이 너무 보고싶다며 ‘무너지지 않고 견디겠다’는 말씀을 반복하셨다. 떠나실 때가 되어 아들을 더 그리워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장례절차는 ‘비전향장기수 박희성 선생 시민사회장례위원회’ 주최로 진행되며, 빈소는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 207호에 마련됐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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