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우크라 전쟁, 어느 민족이 겪은 비극의 연장선 [전쟁과 문학]

이정현 평론가 2024. 10. 28.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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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40편
카자크족의 애달픈 역사
러시아 현대사와 연관돼
러시아에 귀의 후 충성했지만
정작 러시아 2등 국민 취급
1910년대 적백내전 때
왕당파 혁명파로 분열해
1922년 적백내전 끝난 후
또 다시 농노 신세로 전락
러·우 전쟁까지 이어진 비극

카자크족은 러시아 현대사의 격랑에 휘말려 처절한 고통을 겪은 민족이다. 18세기 러시아에 귀의했지만, 그 이후에도 '2등 국민' 취급을 받았다. 러시아를 위해 싸우고, 목숨을 받쳤지만 결과는 늘 '핍박'이었다. 1932~1933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홀로도모르(Holodomor·기아에 의한 대량 학살)'도, 2024년 지금의 러-우크라 전쟁도 그런 비극의 연장선에 서있다.

우크라이나 므콜라이우의 한 지역 시장이 러시아의 공습으로 불타고 있다. [사진=뉴시스]

'자유로운 인간' 혹은 '파수꾼'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카자크족은 본디 폴란드와 러시아 접경지의 초원에 사는 유목민족이었다. 18세기 후반 카자크는 폴란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러시아에 귀의했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 그들은 현재 우크라이나의 돈강 유역에 정착했다. 카자크가 우크라이나 지역의 비옥한 흑토에서 생산한 밀은 유럽 각지로 수출됐다. 그것은 러시아 제국의 중요한 돈줄이었다. 유목민이었던 카자크족은 농사만 지은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군에 편입된 카자크 기병대는 러시아 군사력의 상징이 됐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했을 때 카자크 기병대는 스몰렌스크, 베레지아, 보로디노 등 여러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데 큰 전공을 세웠다. 러시아 황실의 정예 친위부대가 된 카자크 용병들은 제정帝政에 반대하는 자들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이렇게 카자크족은 러시아에 군사력과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점차 러시아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19세기 후반부터 카자크족은 분열했다. 1856년 크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얻기 위해 농노 해방령(1861년)을 내렸다. 농노 해방령에도 카자크 농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이 의지해 살았던 토지는 지주들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하층민들은 토지를 사들이거나 도시로 떠나야 했다. 러시아 산업화 과정에서 카자크족의 상층부는 러시아 귀족층에 편입됐고, 하층민들은 계속 농지에 묶이거나 도시에서 빈민 노동자가 됐다.

대다수 카자크인은 다시 '2등 국민' 취급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대규모 징집이 시행되자 그들은 다시 전장戰場으로 내몰렸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생한 이후 러시아 왕당파와 혁명파 사이에서 '적백내전'이 시작됐다.

적백내전 기간에 발생한 인명 피해는 제1차 세계대전의 사상자보다도 많았다. 카자크인들은 이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을 겪었다. 카자크 상류층은 왕당파인 '백군'에서 싸웠고, 하층민들은 혁명에 동참하는 '적군'에 편입됐다.

우크라이나지역에서 카자크족들은 격렬한 내전에 휘말렸다. 196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러시아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1905~1984년)의 「고요한 돈강」은 바로 이 시기를 다룬 대하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숄로호프는 혁명과 내전에 희생된 카자크인들의 실상을 정밀하게 묘사했다.

카자크인 어머니를 둔 덕분에 숄로호프는 카자크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 어린 나이에 '적군'으로 내전에 참전한 숄로호프는 1926년부터 고향인 돈강 유역에 정착해 「고요한 돈강」 집필에 매달렸다.

소설의 주인공 '그레고리'는 겁 없고 열정적인 카자크 청년이다. 그레고리는 이웃의 아름다운 유부녀 악시나와 사랑에 빠진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레고리의 아버지는 친구의 딸 나탈리아와 그레고리를 결혼시킨다. 그러나 그레고리는 아내 나탈리아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레고리와 악시나는 함께 도주했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레고리는 강제 징집돼 악시나 곁을 떠난다. 전장에서 그레고리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동안 악시나는 성홍열로 어린 딸을 잃고 만다. 절망에 빠진 악시나는 주인집 아들 에브게니의 유혹에 넘어가 귀향한다.

전장에서 생환한 그레고리는 다른 남자를 만난 악시나에게 분노하며 아내 나탈리아에게 돌아간다. 그들이 귀향한 사이에 러시아는 적백내전이 벌어지고, 카자크인들은 각자의 이해관계로 인해 분열한다. 백군 장교가 된 그레고리는 악시나와 다시 재회하지만 내전에서 패배해 쫓기는 신세가 된다.

악시나는 백군 패잔병에게 목숨을 잃는다. 오랜 방황 끝에 그레고리는 어린 아들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총을 겨눴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형 페트로도 내전에 휘말려 사망했다. 그레고리는 절망을 딛고 아들과 함께 다시 삶을 시작한다.

1940년, 12년에 걸쳐 연재한 이 소설을 완간한 숄로호프는 일약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카자크 사회의 변화와 내부의 계급투쟁을 다루면서 그들이 혁명의 와중에 동요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필연성을 해명했다는 찬사와 함께 이듬해에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숄로호프는 종군작가로 참전해 수많은 르포 기사와 소설을 창작했다. 전쟁 이후에도 숄로호프는 좋은 대우를 받았다. 1961년 제22회 소련공산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됐고, 소련 과학아카데미의 정회원을 지냈다. 마침내 1965년, 숄로호프는 「고요한 돈강」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숄로호프의 출세는 적백내전을 다룬 소설 「닥터 지바고(1957년)」를 발표한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년)와 자주 비교된다. 소련 당국은 적백내전을 부정적으로 묘사해 서방세계가 소련을 비판하는 데 일조했다는 이유로 「닥터 지바고」의 출판을 금지했다.

「고요한 돈강」 역시 적백내전을 다뤘지만, 백군 장교의 몰락을 다뤘다는 점과 어린 나이에 적군으로 참전한 숄로호프의 경력 탓에 소련 정부는 다르게 평가했다. 체제와 이념에 의해 문학 텍스트와 작가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 경우다.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는 달리 숄로호프는 소련에서 유일하게 대우를 받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였다.

모든 창작 텍스트의 이면에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있다. 적백내전은 1922년에 끝났다. 카자크 청년 그레고리의 몰락과 비애를 다룬 「고요한 돈강」의 마지막 장면도 1920년대 초반이다. 숄로호프는 「고요한 돈강」을 1926년부터 1940년 사이에 집필했다. 여기서 독자들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폐허가 된 고향에 돌아온 그레고리는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얼어붙은 감자를 캐는 어린이들. 1930년대 초반 극심한 기근으로 우크라이나에서 350만명이 굶어 죽는 비극이 벌어졌다. [사진 | 위키피디아]

숄로호프는 소설에서 '1922년 이후 그레고리의 삶'은 다뤄지지 않았다. '실제 역사'는 그레고리가 평탄하게 살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려준다. 적백내전 이후 카자크인들은 소련 정부의 집단 농장 계획에 따라 우크라이나에서 농노처럼 살아갔다. 생산한 식량은 도시로 보내졌고, 농민들은 굶주렸다.

특히 1932년에서 1933년 사이 우크라이나에서는 350만명이 굶어 죽는 역사상 최악의 '홀로도모르(Holodomor·기아에 의한 대량 학살)'가 발생했다. 우크라이나 돈강 유역에서 소설을 집필한 숄로호프 역시 그 참상을 똑똑히 목격했을 것이다.

숄로호프의 작품 목록을 보면 1930년대를 다룬 텍스트는 거의 없다. 1933년에 대량 아사를 경고하는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냈을 뿐이다. 숄로호프가 작품에서 다루지 않았던 비극은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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