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은 전 국민이 내는데…국립미술관은 왜 서울만?”
2024년 10월25일 정부는 (가칭)국립이건희기증관의 국제설계공모 당선작으로 제제합건축사사무소의 ‘시간의 회복’을 발표했다. ‘시간의 회복’은 가운데가 빈 중정형 건물 3개에 6개의 전시 공간을 배치한 형태를 갖고 있다. 이에 따라 이건희기증관은 모두 1078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2028년 서울 송현공원 안 동쪽에 문을 연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겸하는 이건희기증관의 연면적은 2만5696㎡로 바로 옆에 들어서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5만2125㎡), 과천관(3만7796㎡)에 이어 국내 미술관 중 3위 규모다.
수도권 4곳, 지방은 청주 1곳뿐
또 이건희기증관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과천관, 서울관에 이어 네 번째로 수도권에 들어서는 국립미술관이 된다. 지방의 국립미술관은 2018년 개방형 수장고로 문을 연 충북의 청주관 한 곳뿐이다. 애초 2021년 이건희기증관의 건립이 논의될 때 전국 40여 개 도시가 유치를 신청했다. 그러나 당시 문재인 정부는 유치 신청을 한 도시가 너무 많아 조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새로운 국립미술관을 서울에 짓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김사열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은 “지방 도시들이 이건희기증관 유치를 엄청나게 희망했는데 또다시 서울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 하나하나가 수도권 집중을 더욱 악화시킨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문재인 정부가 지방의 국립미술관 신설을 포기했지만, 그 뒤로도 지방정부들은 미술관 유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국립미술관을 신설해달라고 중앙정부에 요구하거나 적극적으로 국내외 유명 미술관의 유치를 추진했다.
가장 먼저 성과를 거둔 곳은 대구시다. 대구시는 2015년부터 추진해온 대구 간송미술관을 2024년 9월3일 개관했다. 수성구 삼덕동 대구미술관 바로 옆이다. 신윤복의 ‘미인도’와 ‘훈민정음 해례본’ 등이 전시된 개관 전시는 39일 만에 10만 명을 끌어모았다. 하루 평균 2500여 명이 방문하는 성공을 거뒀다.
대구 간송미술관은 446억원의 건축비와 매년 50억원가량의 운영비, 5억원의 작품 구입비를 대구시가 모두 부담한다. 대신 서울 간송미술관은 운영을 위탁받아 소장품을 제공하고 전시한다. 그래서 한편에선 예산 먹는 하마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그러나 기존 시립미술관도 비슷한 비용이 드는 점, 국내 최고 수준의 미술품을 전시, 관람할 수 있는 점,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은 서울에서도 관람이 어려운 점 등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는 반론도 나온다.
대구시에선 국립근대미술관 건립도 추진되고 있다.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대구시의 요구에 따라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이 윤석열 후보의 공약으로 채택됐다. 현재 기획재정부에 예비타당성 조사를 신청한 상태다. 터는 논란 끝에 대구 북구 산격동 대구시청 산격청사(옛 경북도청 건물)로 결정됐다. 최미경 대구시 문화예술정책과장은 “서울의 문화 자원을 지역에서 활용하는 방법으로 대구 간송미술관을 유치했다. 대구뿐 아니라 전국에서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 과장은 “국립근대미술관이 대구에 들어서면 대구미술관의 현대 미술품, 간송미술관의 고전 미술품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대구·부산 등 ‘제 돈 들여' 미술관 추진
대전에서도 국립현대미술관 대전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2020~2027년 추진되는 대전관은 기존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의 포화 상태를 해소하고, 대전·충남권 주민들의 문화예술 향유를 보장하려는 취지에서 계획됐다. 2018년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과 같은 취지다. 대전관은 1932년 지어진 옛 충남도청 건물을 고쳐 연면적 1만2555㎡ 규모로 들어선다.
대전관은 충남도청 이전 뒤 제대로 활용되지 못해온 옛 도청 건물을 재활용하고, 지속적으로 쇠퇴하는 옛 도심을 재생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대전이란 도시의 특성을 고려해 ‘과학과 예술’이라는 주제로 발전시켜나갈 계획이다. 현재 대전시의 시립미술관으로는 연면적 1만4천㎡, 소장품 1400여 점의 시립미술관, 연면적 1703㎡, 소장품 1300여 점의 이응로미술관이 있다. 대전시 노기수 문화관광국장은 “그동안 대전에 국립 문화시설이 하나도 없어서 시민들의 기대가 크다. 대전에서도 수준 높은 미술품을 즐길 기회가 마련될 것 같다”며 “특히 1930년대 건설된 충남도청은 대전 발전의 랜드마크였는데,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나 구도심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경남 진주관 건립에 대해서도 현재 타당성 검토 연구를 추진 중이다. 진주관은 현재의 국립진주박물관이 2027년까지 옛 진주역 터로 이전함에 따라 그 건물에 들어설 예정이다. 아직 구체적 계획은 나오지 않았다.
광주광역시에선 국립현대미술관 광주관 건립 요구가 강하게 나오고 있다. 광주는 한국의 대표적인 예술 도시이며, 1995년부터 국내 최대 규모의 미술 비엔날레가 열리는 도시다. 더욱이 2015년 국내 최대 규모의 단일 문화시설인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연면적 15만6438㎡)이 들어섰다. 그러나 충청권, 경북권, 경남권과 달리 국립미술관 건립이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2024년 4월 광주시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기획재정부에 타당성 조사를 해달라고 건의했다. 8월엔 광주 지역구의 민형배·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국립현대미술관 광주관 유치를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10월엔 국립미술관 터가 마련된 광주시 동구 주최로 두 번째 토론회도 열 계획이다. 신신하 광주시 문화정책관은 “지난 30년 동안 미술 비엔날레를 운영해왔고 시립미술관도 있지만, 소장품의 양이나 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크게 못 미쳤다. 국립현대미술관 광주관이 들어서면 그런 부족함을 해소할 수 있다. 특히 수도권과 충청권, 영남권에 모두 국립미술관이 들어서는데, 호남권만 계획조차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예산·인력·인프라 확보에 어려움
부산은 이건희기증관의 서울 건립이 확정된 뒤 2022 년 1 월부터 다른 방안을 찾아나섰다 . 바로 세계적 현대 미술관인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의 분관을 유치하려는 것이다 . 2024 년 9 월 퐁피두센터와 양해각서 (MOU) 를 맺었고 , 2025 년 12 월 본계약을 맺을 계획이다 . 이를 위해 2024 년 10 월부터 시민들에게 설명하는 자리도 마련한다 .
부산시는 부산시립미술관과 부산현대미술관이란 2개의 시립미술관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부족한 소장품으로는 수준 높은 전시를 열기 어렵다고 말한다. 현재 부산의 2개 시립미술관이 보유한 소장품이 3천여 점인데, 국립현대미술관은 1만1천여 점, 서울시립미술관은 6천여 점으로 양적으로 큰 차이가 난다. 퐁피두센터의 소장품은 14만 점이다. 더 큰 차이점은 소장품의 질적 수준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고 이건희 회장 기증품을 포함해 국내의 대표적 예술가들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퐁피두센터는 말할 것도 없다.
부산시는 세계적 미술관의 분관 유치가 관광 산업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면 스페인의 빌바오는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 분관을 유치해 매년 1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쇠퇴하던 빌바오를 재생하는 효과까지 일으켰다.
부산시 심재민 문화체육국장은 “이건희기증관이 서울로 결정돼 실망했다. 그 뒤 박형준 부산시장이 세계적 미술관 분관 유치를 추진했다. 퐁피두센터가 좋은 점은 풍부한 소장품과 함께 스페인 말라가, 중국 상하이 등 분관 운영의 경험이다. 퐁피두센터 분관이 부산에 온다면 퐁피두센터의 운영 노하우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2025년 상반기 서울 여의도 한화 63빌딩에 퐁피두센터 분관이 먼저 개관해 부산시가 기대하는 효과를 거둘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준모 국립현대미술관 전 학예연구실장은 “부산에 이미 2개의 시립미술관이 있는데, 이것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먼저 해야 한다. 또 시립미술관에서 부족한 점이 소장품인데, 퐁피두센터 분관을 짓는 예산 1천억원이면 좋은 미술품을 꽤 많이 구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일자리나 대학뿐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의 지역 간 불균형도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김사열 전 국가균형발전위원장(경북대 명예교수)은 “현재 지방 젊은이들이 서울로 떠나는 이유 중 하나가 문화예술의 부족이다. 수도권 공공기관을 지방에 이전하는 것처럼 서울이 독점한 문화예술도 지방과 나눠야 한다. 이건희기증관처럼 서울중심주의적 결정으로는 젊은이들의 이탈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고 이건희 회장의 소장품이 대거 기증된 지금이 전국에 국립미술관을 마련할 절호의 기회라는 의견도 있다. 이민원 전 국가균형발전위원장(광주대 명예교수)은 “이건희기증관을 검토할 때 국가 전체의 국립미술관 계획을 세웠어야 한다. 전국의 더 많은 국민이 높은 수준의 문화를 누릴 수 있게 말이다. 지금이라도 이 건희기증관을 백지화하고, 각 지역의 균형과 특성에 따라 국립미술관을 건립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을 요구하는 서울의 미술계도 지방의 국립미술관 건립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2022년 6월 발표한 성명에서 “현재 진행 중인 대전 및 대구 분관 그리고 1도 1분관을 통해 문화국가의 위상을 갖춰야 한다”고 밝혔다. 국립근대미술관 건립 운동에 참여한 최열 미술사가는 “청주관처럼 각 지역의 특성을 반영해 국립미술관을 마련해야 한다. 대구 간송미술관이나 부산 퐁피두센터 분관도 장기적으로 보면 국립미술관으로 활용할 수 있다. 광주는 진작에 제대로 된 국립미술관이 필요했는데, 지금이라도 아시아문화전당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미술도 너무 서울 중심이므로 지방의 주요 도시에 국립미술관 분관을 설치하는 것은 좋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을 얼마든지 순회 전시할 수 있다. 다만, 그러려면 예산과 인력, 인프라를 적극 지원해야 하는데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 정도를 하려면 대통령과 관련 장관들이 모두 나서야 한다. 분관 하나를 마련하기도 결코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필요성 공감” 문체부, 계획은 “아직”
이건희기증관 결정 당시 문체부 장관을 지낸 황희 민주당 의원은 “당시 이건희기증관 유치를 원하는 지역이 많아서 한 곳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 대안으로 전국 4곳에 이건희 기증품을 순회 전시할 수 있는 네트워크 뮤지엄 운영을 계획했다. 충청권의 청주관, 호남권의 광주 아시아문화전당 활용, 경북권의 경북도청 리모델링, 경남권의 창원 국립미술관 신설 등이었다. 그러나 그 뒤 정부가 바뀌면서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방정부와 미술계가 모두 요구하는 거점 도시 국립미술관 확대에 문체부는 여전히 소극적이다. 문체부 강수상 대변인은 “전국의 거점 도시에 국립미술관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한다. 다만 언제, 어떻게 추진할지에 대해 지역과 미술계의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 아직 구체적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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