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꿈속 화원, 튀긴 꽃의 냄새…‘전에 없던 감각’ 피어난다

박동미 기자 2024. 10. 28.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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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투라 서울에서 선보인 미디어 아티스트 레픽 아나돌의 ‘대지의 메아리: 살아있는 아카이브’ 전시 풍경. 푸투라서울 제공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우린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는 그 이상도 볼 수 있다. 그게 다소 난해한 현대미술의 묘미 아닐까. 아직 그 매력을 모르겠다면, 여기 두 개의 전시로 입문하면 어떨까. 눈앞에 펼쳐지는 형태는 낯설지만, 사실 아주 가깝고 친숙한 것들로부터 시작된 ‘또 다른 세계’다. 최근 서울 북촌에 개관한 푸투라 서울에서는 자연을 학습한 인공지능(AI)의 꿈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한남동 리움 미술관에서는 꽃을 잔뜩 튀겨 놓은 ‘덴푸라 산’과 마주한다. 여기서 자연은, 꽃은, 세계는, 우리가 알던 그것이 아니다. 실재와 허상 사이 ‘제3의 눈’을 장착하러 가보자. 레픽 아나돌의 ‘대지의 메아리: 살아있는 아카이브’와 아니카 이의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이다. 둘 다 아시아에서 처음 선보이는 대규모 개인전이라 더욱 주목된다.

◇기묘하고 낯선 ‘대지의 메아리…’ AI가 꿈꾼 서울의 풍경 = 튀르키예 출신으로 세계 미술신에서 주목받는 미디어 아티스트인 레픽 아나돌은 AI가 학습하고 수집한 자연 정보를 기반으로 기묘하고 낯선,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자연을 시각화했다. 흥미로운 건, 단순히 학습과 활용 수준에 머물지 않고, AI의 환각 즉, AI가 꾸는 꿈까지 개념을 확장한 것이다. 아나돌은 “요즘 관객들은 명상과 몰입 등 깊은 생각에 빠지는 경험을 추구한다”면서 “이곳에서 AI가 자연을 어떻게 꿈꾸는지, 깊고 새로운 경험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아나돌의 스튜디오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한 ‘대규모 자연 모델(LNM)’을 기반으로 가능했다. 이 모델은 지난 10년간 작가가 수집한 전 세계 16곳 우림의 사진과 소리, 3D 데이터 등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시점을 더해 자연을 파악했다. 이렇게 태어난 ‘또 다른’ 자연의 형태와 색감, 에너지가 어우러진 전시는 우리가 인식해 온 자연을 떠오르게 하면서도, 실제와 디지털 세계 사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은 ‘가짜’ 자연, 그리고 언제가 도래할 ‘미래’의 자연을 상상하게 한다. 특히, 1억 개가 넘는 자연 풍경 이미지에 기반한 ‘기계 환각-LNM: 풍경(Machine Hallucinations-LNM: Landscape)’을 마주하면서, 어디선가 풍기는 쌉싸래한 풀냄새를 맡게 되면, 이 전시가 이 미술관의 이름인 ‘푸투라’(미래를 뜻하는 라틴어)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림을 감지하게 된다. 개관작으로서 탁월한 선택이다.

작가가 서울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서울 바람’도 놓쳐선 안 된다. 친근하면서도 신선한 ‘관람 경험’이 되니까. 서울 전역의 풍속, 풍향 등 각종 자료를 수집해 구현한 역동적인 작품은 매일 마주하지만 ‘볼 수 없는’ 바람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인간과 기계가, 기계와 자연이, 그리고 다시 자연과 인간이 연결되는 ‘순환의 필연’을 느끼는 순간, AI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예술이 하는 일은 무엇인지, 인류는 지금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지, 질문을 한 아름 품은 채 출구를 향하게 된다.

전시는 올해 초 영국 런던의 현대미술관 서펜타인에서 5주간 약 7만 명이 관람한 히트작이다. 아시아에선 서울 전시가 최초. 아나돌은 AI를 활용한 이번 전시에 대해 “과거의 재료가 물감이었다면 나는 마르지 않는 소재인 ‘데이터’를 쓴다”며 전시에 대해 “완전히 자유롭고, 멈추지 않으며, 끊임없이 색깔과 형태와 질감이 변화한다”고 강조했다. 관람료 2만2000원, 12월 8일까지.

◇‘또 다른 진화…’가 만든 감각의 실험… 꽃을 튀기니 기괴하고 즐겁다 =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로, 국내 첫 대규모 개인전을 열고 있는 아니카 이는 패션계에서 일했던 독특한 경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바이러스와 세포, 균 등 인간의 시야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을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오며 국제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박테리아, 효모, 부패하는 꽃, 해조류 등 이번에도 ‘비인간’ 존재들을 잔뜩 선보이는 전시는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해온 지난 10여 년간의 작품 33점을 대거 공개했다.

리움미술관에서 공개된 아니카 이의 설치작품 ‘절단’. ‘튀긴 꽃’을 2m 넘게 쌓고 쿰쿰한 냄새를 입혔다. 리움미술관 제공

전시장에는 우리가 가진 편견과 고정관념뿐만 아니라 감각조차 ‘제로’로 만든 후 들어서는 게 좋다. 쾌적하고 기분 좋은 그림들이 걸려 있을 거라는 흔한 기대와 달리, 전시장엔 시큼한 냄새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들, 그리고 알 듯 모를 듯한 형태의 조명들이 박람회장처럼 걸려 있다. 작가는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대표작 ‘절단’(2024)에서 그 핵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는 튀긴 꽃에 레진을 입힌 설치물로, 부패할 때 나는 시큼한 냄새를 풍기고, 점점 색과 형태가 변하는 작품이다. ‘냄새’는 작가의 예술 세계의 주요한 축이다. 이에 대해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방한 당시 “냄새는 분자 수준에서 지각에 침투해 변화를 일으킨다. 이질적인 냄새가 감각적 경험에 몰입하게 하고, 관객은 인간과 환경,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인식 상태가 된다”며 의도를 밝혔다.

작가의 전시장이 ‘감각의 실험실’이 된 것은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한 경험과 관계가 있다.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작가는 ‘냄새’가 어떻게 사람을 타자나 이방인으로 분류하는지 자주 경험했다. 그는 “냄새는 정체성·소속감·배제와 깊이 연관돼 있으며 차이를 나타내는 강력한 표식”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그의 작업은 “억압되고 소외된 감각적 경험을 되찾는 것”이며, 관객은 그가 꾸려 놓은 실험실에서 현대 미술의 미덕인 ‘낯선 감각’을 맛보며, ‘냄새의 정치학’에 대해 배우고, 공감하게 된다.

냄새뿐만 아니라, 눈이 시큰거릴 정도로 강렬한 ‘빛’으로 인해 이번 전시는 더욱 기괴하고 즐거운 경험이 된다. 어두운 전시 공간엔 조명 대신 오로지 작가의 ‘조명 같은’ 설치물이 줄줄이 걸려 있다. 5억 만년 전에 등장한 원생동물을 소재로 한 ‘방산충 연작’을 비롯해 누에고치를 닮은 조형물 ‘기억잠복세포’ ‘푸른 민달팽이’ ‘완두수염진딧물’ 등이 노란빛을 뿜어낸다. 이쯤 되면 실험실을 넘어 ‘감각의 천국’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관람료 1만2000원, 12월 29일까지.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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