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족에 평생 사죄”…5·18 당시 계엄군 지역대장, 광주 민주묘지 참배

노기섭 기자 2024. 10. 28.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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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당시 7공수여단 33대 7지역대장(중위)으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 고성준(75) 씨는 27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고 난 뒤 이같이 말했다.

과거에 시위 진압 임무에 투입됐거나 사복을 입고 정보 수집 활동을 했던 '편의공작대' 출신 계엄군의 참배는 여러 번 있었지만,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관급 계엄군이 공개적으로 참배한 것은 고 씨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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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위 계급’ 고성준 씨, 시민 향해 총 쏘고·진압봉 무차별 폭행 고백
27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계엄군이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계엄군은 입이 10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5·18 유가족에게 평생 사죄하며 진상규명을 돕겠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7공수여단 33대 7지역대장(중위)으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 고성준(75) 씨는 27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고 난 뒤 이같이 말했다.

과거에 시위 진압 임무에 투입됐거나 사복을 입고 정보 수집 활동을 했던 ‘편의공작대’ 출신 계엄군의 참배는 여러 번 있었지만,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관급 계엄군이 공개적으로 참배한 것은 고 씨가 처음이다. 고 씨는 44년 전 자신의 지휘를 받아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진압 작전을 행했던 지역대원 100여 명의 만행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했다.

“대학생 주도로 폭동이 일어났으니 이 사태를 진압하라”는 상부 명령을 믿었고, 도심을 오가는 시민군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44년 만에 참회했다. 시종일관 굳게 다물었던 고 씨는 계엄군의 폭행으로 숨진 5·18 최초 사망자 고(故) 김경철 열사 묘역에 도착하자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죄송합니다”고 말문을 열었다.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선포된 1980년 5월 17일 광주에 가장 먼저 투입됐던 고 씨는 시위 진압을 위해 전남대로 투입됐다.

‘폭동 사태’라는 상부의 말과 달리 투입 첫날 이렇다 할 대치는 없었고, 본격적인 시위 진압 작전은 18일 오전 10시 동구 금남로 일대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조선대로 주둔지를 옮겨 도심을 오가는 시민들의 머리를 진압봉으로 여러 차례 때렸고, 눈에 보이는 족족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고 한다. 계엄군의 만행에 맞선 시민들 역시 과격한 시위를 벌였는데, 이 시위에 못 이긴 고 씨의 지역대는 5월 20일 전남 화순군 등지로 철수하면서 시민들을 향해 총을 쐈다. 고 씨는 “‘부사관 1명이 시민군의 총알에 맞았다’는 무전병의 보고를 받았다”며 “‘어디서 쐈는지 모르니 옥상 방향으로 총을 쏘라’고 최초 발포 명령을 내가 내렸다”고 고백했다.

갈수록 악화하는 대치 상황에서 다쳐가는 부하를 지키기 위한 자위권 목적의 명령이었다면서도 신군부 핵심 세력 등의 상부 지휘·지시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서로를 향해 총을 쏘며 생사가 오가는 진압 작전에 투입된 데다가 4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탓에 헬기 사격 여부 등 구체적인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고 씨는 “지역대장·참모들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헬기 기총 사격을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며 “다만 당시 우리가 계엄군이었으니 계엄군의 작전·지시에 대한 책임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는 “나 같은 계엄군들이 사과해서 피해를 본 광주 시민의 노여움이 풀릴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사과하겠다”며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었던 5·18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계엄군들이 스스로 뉘우쳐야 한다”고 말했다. 고 씨는 이날 임성록 특전사동지회 고문과 김 열사의 어머니 임근단 여사·주남마을 유일 생존자 홍금숙 씨 등과 함께 오월 영령에 참배했다. 헌화·분향으로 오월 영령의 넋을 기렸고, 행방불명자 묘역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절을 두 번 하기도 했다.

노기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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