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산문의 혁신가, 한강의 시대가 왔다

차형석 기자 2024. 10. 28.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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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 문학사의 일대 사건이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언급한 노벨문학상 수상 발표는 그의 소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더욱 주목하게 한다.

2024년 10월10일 오후 8시(한국 시각), 스웨덴 스톡홀름의 스웨덴 한림원. 마츠 말름 스웨덴 한림원 사무총장의 입에서 ‘한강’이라는 이름이 나올 거라고 예상한 이는 무척 드물었다. 이날 민음사 해외문학팀 편집자 세 명이 노벨문학상 발표를 유튜브로 생중계했다. 해마다 생중계를 했고, 반응이 좋아 ‘노벨문학상 생중계 맛집’으로 불리는 출판사 채널이었다. 이들은 중국의 찬쉐, 일본의 다와다 요코, 캐나다의 앤 카슨 등 다른 문인을 후보자로 예상했다. ‘한, 캉’이라는 발음이 들렸을 때, 한 편집자가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한강?” 잠시 후 환호성이 이어졌다. 한국 문학사의 사건이 펼쳐진 순간이었다. 한국인이 노벨상을 받은 건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후 24년 만이다.

10월14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한강 작가 특별 코너가 마련되었다. ⓒ시사IN 이명익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이후 ‘한강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 펼쳐졌다. 전혀 과장이 아니다. 10월16일 오후 2시 현재,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는 1위부터 10위까지 ‘예약 판매’를 포함해 모두 한강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예스24, 알라딘 순위도 마찬가지다. 종합 베스트셀러 10권 중 9권이 그의 작품이다. 10월16일 오전 9시 기준으로 한강의 책은 종이책만 103만2000부가량 판매되었다(예스24 43만2000부, 교보문고 36만 부, 알라딘 24만 부). 세 서점의 전자책 판매량 7만 부가량을 합하면 노벨상 수상 발표 이후 6일 만에 110만 부 넘게 판매되었다.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해외 온라인 서점 아마존(아마존재팬 포함)에도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 등 한강의 소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작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버지인 한승원 작가가 책을 낸 출판사들과 협의해 기자회견을 하는 게 어떠냐고 조언했지만 작가는 기자회견을 하지 않기로 했다. 부친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냐’고 했다. 한강 작가는 수상 발표 이후 단 한 번 스웨덴 공영 SVT방송과 인터뷰를 했는데, 이 자리에서 “지금은 주목받고 싶지 않다. 이 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세계에 많은 고통이 있고, 우리는 좀 더 조용하게 있어야 한다”라는 뜻을 전했다. 문학과 삶에 대한 그의 생각은 12월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시상식의 수상 소감문에서 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0월17일 한강 작가가 서울 아이파크타워에서 열린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 참석했다. ⓒ사진공동취재단

■ ‘고투’라고 부를 만한 창작 과정

스웨덴 한림원은 공식 발표문에서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수상 이유로 들었다. 성민엽 문학평론가는 한강의 문학을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초기작 〈여수의 사랑〉과 〈내 여자의 열매〉에서 〈그대의 차가운 손〉을 거쳐 〈채식주의자〉에 이르는 한 갈래와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대표작으로 하는 다른 한 갈래.’ ‘역사적 트라우마’를 언급한 스웨덴 한림원의 수상 발표문은 후자를 주목하게 한다.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한강 작가는 소설 두 편을 발표한 이후인 2014년과 2022년에 동료 소설가인 김연수 작가, 정용준 작가와 문예지 인터뷰를 한 바 있다. 이 두 글에서 작품의 탄생과 창작 과정을 엿볼 수 있다(아래에 나오는 인용은 이 두 글에 나오는 한강 작가의 말이다. 두 글에 기반해 내용을 재구성했다).

김연수 소설가와의 인터뷰(2014)에서, 한강 작가는 친척들이 광주에 있었기에 1980년 당시에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어디 가서 얘기할까 봐 어른들이 목소리를 죽여서 말하는데, 그럴 때마다 더 듣고 싶어서 귀를 기울이게 됐”다. 서울로 올라온 뒤 열세 살 즈음, 부친인 한승원 작가가 광주에서 구해온 5·18 사진첩을 아버지의 책장에서 보게 되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그 사진첩은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된 비밀스러운 계기가 되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처음부터 광주 이야기를 전면적으로 쓰려던 게 아니었다. 〈희랍어 시간〉을 쓰고 나서 ‘인간의 깨끗하고 연한 지점을 응시하는 아주 밝은 소설’을 쓰려 했는데, 진척이 안 되었다고 한다. “내가 정말 인간을 믿는가, 인간을 껴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맞닥뜨렸어요. 그때까지 쓰던 걸 그만두고 내가 왜 이 소설을 쓸 수 없는가를 생각하다가, 유년 시절에 간접 체험했던 5월 광주에 이르게 됐어요. 그때 이미 나는 인간을 믿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이제 와서 인간을 믿겠다고 하는 것일까, 자문하다 보니 이 이야기를 뚫고 나아가지 않으면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강 작가는 자료 조사를 위해 2012년 겨울, 광주로 갔다. 석 달 동안 자료를 읽었다. 수많은 증언 자료를 읽으면서 ‘내면의 투쟁’을 치렀다. “수백 명의 증언이 빽빽하게 기록된 자료집이 있는데, 하루에 여덟에서 아홉 시간 정도 그 책만 읽었는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죽은 소년과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자, 마지막에는 어머니가 말하게 하자고 큰 틀을 잡았”다. 주인공 동호는 실제 모델이 있다. 광주상고 1학년 학생으로 1980년 5월27일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의 총에 숨진 문재학 군(〈시사IN〉 제557호 ‘아들의 손 놓고 울음 삼킨 38년’ 기사 참조). 노벨문학상 발표 이후 ‘문재학 어머니’ 김길자씨는 “한강 작가가 집을 방문해 아들의 사연을 듣고 간 적이 있다”라고 언론 인터뷰를 했다.

2018년 4월19일 '문재학 어머니' 김길자씨가 1980년 5월27일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숨진 아들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한강 작가는 2013년 3월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고, 〈소년이 온다〉는 창비 문학블로그 ‘창문’에 2013년 11월부터 2014년 1월까지 연재되었다. 작가에게 이 소설 쓰기는 ‘같이 고통을 느끼는 것’이었다. “아침에 작업실에 가서, 석 줄 쓰고 한 시간 울고, 해가 질 때까지 멍하게 앉아 있다가 오고 그랬어요.” 소설은 계엄군의 총에 스러진 소년 동호를 중심에 두고, 여섯 명의 시선으로 역사적 사건과 인간 내면의 상처를 드러낸다. 작가의 고투 끝에 얻은 고통 어린 문장은 독서를 여러 번 멈추게 한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년이 온다〉와 짝을 이루는 작품이다.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부터 그는 악몽을 자주 꾸었다. 꿈 때문에 몇 분 간격으로 깨기도 했다. 〈소년이 온다〉가 나온 해, 여름에 꾼 꿈을 적어두었다. ‘눈 내리는 벌판에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가 심겨져 있다. 그 벌판의 끝은 바다였고, 밀물이 밀려와 검은 나무 뒤편의 봉분이 잠겨 들어간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서두에 나오는 이미지다. 그 꿈이 작가에게 영향을 주어서, 장편 집필로 이어졌다고 한다. 첫 페이지를 쓴 날부터 완성하기까지 거의 7년이 걸렸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면서도 〈소년이 온다〉를 쓸 때처럼, 그는 구술 증언을 읽었다. 한 생활 잡지를 읽는데, 제주 할머니에게 인생 상담을 하는 내용이 있었다. “‘제주에서 렌터카 타기가 너무 힘들어요’ 하고 상담하면 ‘그냥 버스 타라’ 하는 식인데요. 그런 재미있는 대답들 사이로 4·3 이야기가 예고 없이 쑥 들어와요. ‘운동장에 몰아놓고 사람 다 죽이는 것, 내가 그런 것 다 보고 살았지.’ 그 잡지들에서 출발해서 4·3 연구소에서 발행된 구술 증언집들을 구해 읽어갔어요. (중략) 이 두 편의 소설들에서 고통의 감각이 느껴진다면, 둘 다 출발점이 구술 증언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작별하지 않는다〉 초고를 쓰면서는 수면 상태가 괜찮았는데, 다시 자료를 읽기 시작하면서 악몽이 찾아왔다고 한다. 900매를 쓴 상태에서 그만두려고도 했다. 집필을 중단하고 포기한 상태에서 황정은 작가를 만났다. 〈문학동네〉에 연재했던 전반부를 다 읽었는데, 그 소설 언제 나오느냐고 황 작가가 한강에게 물었다. “900매인데 다 버릴까 한다고 했더니 놀라면서 그건 말도 안 되는 거라고, ‘900매를 버려요?’ 하면서 막 야단치는 거예요 선배 제정신이냐고. ‘900매를 버려요?’ 하고 계속 되묻기에 제가 한발 물러서서, 그럼 버리진 않고 1년쯤 놔두면 나중에 써지지 않을까요, 했더니 ‘놔둔다고 되겠어요? 빨리 써서 마무리를 해야지’ 이러면서 계속 야단치는 거예요(웃음). 쓰기만 하면, 완성해서 책만 내주면 내가 정말 잘 읽을 테니 완성을 꼭 하라고. (중략) 그 말이 깊이 박혔어요.” 주인공 경하와 친구 인선 그리고 인선의 어머니 정심. 세 여성의 시선으로 제주 4·3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그로 인한 내면의 상처를 독특한 이미지와 죽음과 삶의 경계가 모호한 환상성으로 드러내는 이 소설을 자칫 못 보거나, 더 늦게 만날 뻔했다.

■ 그가 말한 ‘시적 산문’의 비밀

스웨덴 한림원은 “작가는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대해 독특한 인식을 지니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되었다”라고 밝혔다. ‘시적 산문’이라는 표현은 한강 작가의 소설에 대한 평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작가는 1993년에 계간지 〈문학과 사회〉에서 시로 등단했다. 등단 20년 만에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펴내기도 했다. 최근 〈문학과 사회〉 가을호에도 시 두 편을 발표했다.

10월10일 마츠 말름 스웨덴 한림원 사무총장이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 작가를 발표했다. ⓒREUTERS

〈작별하지 않는다〉 출간 이후 소설가 정용준이 작가에게 묻는다. ‘문장을 쓰실 때 어떤 마음으로 쓰시나요?’ 작가 한강은 이렇게 답했다. “장면으로 제가 먼저 들어가서 그걸 느끼고, 그걸 문장으로 써요. 그리고 소설 쓸 때, 마지막까지 그걸 더 넣으려고 노력해요. 그 순간의 생생함을 조금이라도 더 넣으려고. 탈고할 때는 시도 많이 읽어요. 시들이 그런 일을 하잖아요. 순간의 생생함에 육박하는 일. 시의 상태에 가까워져서 소설 전체를 생생한 감각으로 훑고 지나가고, 쉬었다가 또 지나가고. 계속 전류가 통하게 하려고.”

한강 작가는 〈디 에센셜 한강〉에 실린 산문 ‘기억의 바깥’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그에게 글쓰기가 무엇인지, 글쓰기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스물여섯 살의 여름, 첫 책을 출판사에서 받아든 오후에 느낀, 말로 옮기기 힘든 복잡한 감정. 증정본으로 받은 ‘내 책’ 다섯 권을 가방에 넣고, 꺼내보지도 못한 채 혼자서 한동안 일층 카페에 앉아 있었던 것. 그후 지금까지 보낸 시간. 쓰고, 쉬고, 쓰고, 때로 오래 쉬고, 다시 썼던 그 밖의 다른 말로는 요약하고 싶지 않거나, 달리 요약할 수 없는 시간.’ ‘글을 쓸 때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움직이지 못한다. 걷지도 먹지도 못한다. 가장 수동적인 자세로, 글쓰기 외의 모든 것을 괄호 속에 넣고 한 단어씩 써간다. 그 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 그게 다행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다행이다. 움직일 수 없어서 다행이다. 나의 것이라고 이름 붙은 삶의 모든 것을 괄호 속에 넣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세상은 떠들썩한데, 작가는 침묵을 선택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대사건도 어쩌면 괄호 속에 넣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쓰고 쉬고 다시 쓴다는, 한강의 시간이 왔다. 다행이고, 축하할 일이다. 그에게도, 한국 문학에게도.

※ 참고자료: 〈사랑이 아닌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한강과의 대화〉(김연수, 2014, 창비), 〈빛이 머물다 간 자리〉(한강·정용준, 2022, 악스트), 〈디 에센셜 한강〉(한강, 2023, 문학동네)


 

 

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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