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우의 색깔로 칠한 ‘햄릿’… 주인공만 보이는 게 유일한 결점

이태훈 기자 2024. 10. 28.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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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역할로 24년 만에 연극 도전
비극적 운명으로 엮인 친구와 맞서야 했던 검술 시합, ‘햄릿’(조승우)은 숙부 왕이 쳐놓은 덫을 피하지 못하고, 마지막 분노를 폭발시킨다. /예술의전당

연극 ‘햄릿’은 연출가나 배우에게 독이 든 성배(聖杯)다. 셰익스피어의 가장 긴 희곡이며 가장 강력한 비극. 숭고한 시편과 풍성한 심리 묘사, 방대한 장광설 같은 독백과 이종 격투기를 방불케 하는 언어의 혈투…. ‘햄릿’이라는 고유명사의 아우라는 지금껏 예술가들이 창조한 어떤 인물보다 더 강력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위험 부담도 크다.

배우 조승우(44)가 지난 18일부터 바로 그 ‘햄릿’으로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 서고 있다. 영화, 드라마와 뮤지컬에선 이미 자신을 증명했지만, 연극 무대는 그에게도 24년 만이다.

‘햄릿’은 어쩌면 모든 남자 배우의 커리어에서, 셰익스피어라는 ‘연극의 왕관’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누군가의 이마 위에 빛나길 기다리는 보석. 조승우는 기꺼이 그 역할을 자임했다. 티켓 오픈과 함께 1000석 규모의 전석 전 회를 매진시킨 힘은 조승우가 과연 어떤 색깔의 햄릿으로 빛날 것인가 상상하는 관객의 기대에서 나온 힘일 것이다.

압도적 180분이었다. 관객은 ‘햄릿’의 감정선을 따라 울고 웃고 가슴 졸이다 끝내 무너져내렸다. 이 무대의 유일한 결점은 햄릿만 보인다는 것뿐이다. 예술가로서 한 배우가 도달한 어떤 절정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은 관객의 큰 복이다.

햄릿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역시 아버지 왕을 잃은 슬픔, 왕좌와 어머니까지 차지한 숙부를 향한 복수심을 표현할 때의 정서적 깊이다. 부왕의 유령을 처음 마주할 때 햄릿은 말한다. “왜 수의를 찢고 다시 나타났는지, 육중한 무덤이 어째서 다시 당신을 뱉어냈는지. 말하라, 내가 여기에 있다!”

수많은 최고의 연출가와 배우들이 그동안 ‘햄릿’을 아버지의 복수에 눈먼 아들이나, 치정과 불륜에 치를 떠는 도덕주의자, 트라우마와 망상증에 시달리는 정신 질환자로 다양하게 해석했다. 하지만 조승우의 햄릿은 구시대의 질서와 불화하며, 옛것을 뚫고 나오려 애쓰는 인간이다. “시대의 관절이 모두 어긋나 버렸어. 그걸 바로잡는 일, 그 저주가 내 운명이었다니….” 그러나 종교개혁의 성지 비텐베르크에서 먼저 새로운 시대를 보고 온 햄릿조차 저주받은 운명의 소용돌이에 속절없이 휩쓸려간다.

공연 시간이 긴 만큼 원작의 결을 충분히 살려내, 다른 ’햄릿’에선 지나가듯 소모되던 캐릭터들이 생명력을 얻은 것도 수확이다. 특히 햄릿의 오랜 친구이지만 배신하는 ‘로젠크란츠’(이강욱)와 ‘길덴스턴’(전재홍) 콤비는 일종의 개그 캐릭터로 다시 태어났다. 객석을 들었다 놨다 웃기는 건 대부분 이 둘의 몫이다. 게다가 햄릿이 이 콤비와 만나 만담하듯 대사를 주고받을 땐 목이라도 조를 듯 팽팽하던 무대 위 공기가 느슨해진다. 관객에게 숨 쉴 틈을 주고 극에 리듬감도 생긴다.

유랑극단장 역의 배우 이남희(62)가 숙부 왕의 죄를 까발리는 극중극은 따로 준비된 한 편의 모노드라마 같다. 짧은 출연 시간에도, 평생 무대에서 쌓은 연기 내공이란 무엇인지 웅변하듯 보여준다. 고답적이고 난해한 셰익스피어 원전의 말맛을 잃지 않으면서 귀에 쏙쏙 들어오는 현대어로 풀어낸 공력도 놀랍다. 각색을 맡은 황정은 작가의 공이 크다. 토월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 위로 무대를 확장해, 배우들이 관객 가장 가까운 데까지 다가가 연기하게 한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덕분에 대극장 무대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아직 경험이 부족한 신인이나 TV가 더 익숙한 일부 배우의 연기가 겉도는 듯 보이는 순간을 문득문득 만난다. 압도적 햄릿 혹은 무대 경험이 많은 다른 배우들 곁에 설 때 이 단점이 도드라져 더 아쉽다. 다음 달 17일까지, 2만~1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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