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전쟁’ 최대 수혜자가 美·中 패권 다툼 때렸다

장형태 기자 2024. 10. 28.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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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 창업자 모리스 창
“반도체 자유무역은 죽었다”
그래픽=양인성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1위인 대만 TSMC의 모리스 창(중국명 장중머우·93) 창업자가 공개 석상에서 “반도체 자유무역의 시대가 끝났다”며 “TSMC가 올해 최고 실적을 기록했지만,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의 약 60%를 차지하고, 데이터센터 핵심 부품인 인공지능(AI) 가속기의 99%를 위탁 생산하는 기업의 창업주가 ‘반도체 자유무역’의 후퇴에 경고를 보낸 것이다. 모리스 창은 지난 26일 대만 신주현에서 열린 TSMC 연례 체육대회에 참가해 “반도체, 특히 첨단 반도체 부문의 자유무역은 죽었다”며 “이러한 환경에서 계속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TSMC의 도전”이라고 했다.

TSMC는 엔비디아와 함께 미·중 반도체 패권 전쟁과 본격적인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급변하는 반도체 시장에서 최대 승자로 꼽힌다. 그럼에도 모리스 창이 이같이 말한 것은 미·중 대립으로 글로벌 반도체 분업 체계가 무너지면서 반도체 기업의 성장에 악재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 /로이터 뉴스1

◇미·중 갈등의 유탄 맞은 동맹국

2020년 미국의 대중 제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 세계 반도체 산업은 ‘미국의 설계 - 한국·대만의 생산 - 중국의 소비’로 이어지는 분업 체계가 작동했다. TSMC는 애플·퀄컴 등 미국 빅테크에서 주문받은 첨단 반도체를 생산했고, 이 반도체는 스마트폰·PC·서버에 탑재돼 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팔려 나갔다. 화웨이 같은 중국 전자 업체의 주문도 직접 수주했다.

미국은 한국·대만·일본·네덜란드 등 동맹국을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하고, 동맹국 중심으로 반도체 공급망을 공고하게 구축한다는 목표였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반도체 정책은 동맹국의 반도체 기업에도 타격을 주고 있다. 미·중 반도체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2019년 TSMC의 매출 가운데 약 20%가 중국 시장에서 나왔다. 하지만 현재 TSMC 매출 중 중국 비율은 10%로 떨어져 있다. 한국의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만든 메모리 반도체도 대중 제재 기업에 올라와 있는 화웨이 등에는 판매가 금지돼 있다.

그래픽=양인성

설상가상 중국 메모리 제조사 CXMT가 D램 생산량을 무섭게 늘리고 있다. 노무라증권에 따르면 CXMT의 웨이퍼 월 생산량은 연말 20만장, 내년 30만장에 도달해 전체 D램 시장의 15%를 차지할 전망이다. 3위인 마이크론(약 20%)의 턱밑까지 추격하는 것이다. CXMT는 내친김에 연내 2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 양산을 목표로 하면서, AI 메모리까지 자립에 나선 것이다.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미국이 중국의 AI 발전을 저지하려고 반도체까지 막는 상황”이라며 “중국이 철저하게 자립을 추구하면서, 우리 반도체 기업들은 중국이라는 안정적 고객뿐 아니라 성장 기회도 잃고 있다”고 했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업체 ASML도 미·중 갈등의 유탄을 맞았다. ASML은 지난 3분기 실적 발표에서 내년 중국 매출 비율을 20%로 예상했다. 직전 분기 중국 비율이 49%에 달한 것과 비교하면 절반 이하로 급격히 줄어드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는 라피더스도 2027년 2나노 공정 양산을 계획 중이지만, 중국 판매가 불가능할 경우 첨단 반도체 시장에 안착하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라피더스가 처음부터 애플·엔비디아 같은 미국 빅테크를 고객으로 확보할 가능성은 낮다”며 “중국 물량을 우선 확보하는 것이 현실적인데, 대중 제재가 풀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미·중 갈등은 미국 기업인 인텔에도 부메랑이 되고 있다. 인텔은 중국에 PC용 CPU(중앙처리장치)를 수출해 왔으나, 첨단 반도체라는 이유로 지난 5월 미 정부에서 수출 자격을 취소당했다. 중국 수출 물량 감소에 2021년 재진출을 선언한 파운드리 사업 부진까지 더해져 지난해 70억달러가 넘는 영업 적자를 기록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을 대체할 만한 시장이 없다는 게 미국과 동맹국들의 딜레마”라고 말했다.

바이든 정부가 TSMC·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공장을 미국에 유치하는 것도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는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모리스 창은 지난해 한 포럼 연설에서 “미국의 반도체 공장 유치로 칩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 TSMC는 가격 상승과 공정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최첨단 공장은 미국이 아닌 대만에 두겠다는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중국은 첨단 반도체 자립 나서

중국은 미국 제재 속에서도 첨단 반도체 자립을 시도하고 있다. 화웨이는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AP를 TSMC에 위탁해 고성능 칩을 생산했었다. 2020년 미국의 제재로 첨단 칩 제조가 막히자, 자국 파운드리를 통해 생산에 성공했다. 지난해 출시된 화웨이의 플래그십 스마트폰 ‘메이트 60 프로’에 탑재된 7나노급 칩은 중국 SMIC가 구형 공정으로 생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웨이가 올해 출시한 ‘퓨라 70′ 시리즈는 카메라를 제외한 부품의 90% 이상이 중국산이었다.

중국은 AI 가속기도 자체적으로 설계·제작하고 있다. AI 가속기는 AI 학습과 추론에 필수적인데, 중국 기업들은 엔비디아의 고성능 AI 가속기를 구할 수 없다. 화웨이는 지난해 자체 설계하고 SMIC가 7나노 공정으로 생산한 어센드 910B를 출시했다. 지난달에는 이를 업그레이드한 신제품을 선보였다. 이는 엔비디아의 현재 주력 제품과 비슷한 수준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은 구형 공정을 사용해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설계 노하우를 쌓고 있다”며 “중국 반도체의 기초 기술력이 한 차원 진화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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