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뒤쫓기 게임’ 한미 통상협의 8년, 이제 틀을 깨자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24. 10. 28.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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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양인성

미국 대선이 한 주 앞이다.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그런데 한미 양국 교역과 투자의 관점에서는 해리스와 트럼프 중 누가 당선되든 큰 차이를 기대하긴 힘들다.

민주당, 공화당 모두 미국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일방주의 정책에 따른 대중(對中) 압박과 핵심 기술 공급망에 대한 통제에선 한목소리다. 이 부분에선 트럼프 4년, 바이든 4년이 결국 똑같았다. 정치적 대척점의 두 대통령이 여기에선 한 길을 간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트럼프는 고율 관세를 내세우며 전방위 공세를 예고한다. 그런데 고율 관세는 세계적으론 큰 파장일지언정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다. 그간 대미(對美) 관계에서 우리 고민은 관세가 아니라 핵심 품목에 대한 들쭉날쭉하고 예측 불가능한 규제였다. 멋있게 포장한 ‘공급망 재편’이다. 해리스든 트럼프든 앞으로 4년도 이 길로 쭉 직진하리라 본다.

대신 지난 8년이 투박한 실험이었다면 앞으로 4년은 정교한 압박으로 전개될 공산이 크다. ‘공급망 재편 2.0′이랄까.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인공지능, 양자 컴퓨팅 분야에서 8년 노하우가 녹아 든 촘촘한 법령과 규제망이 예견된다. 우리 정부에 대한 요청은 더 구체적이고 기업을 향한 요구는 더 직접적일 것이다.

미국 내 흐름을 바꿀 순 없다. 하지만 우리 대응을 바꿀 순 있다. 그간 우리가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일까? 지난 8년은 끊임없는 ‘뒤쫓기’ 게임이었다. 미국발 현안이 발생하면 사태 파악과 후속 대응에 여념이 없었다.

가령 반도체를 보자. 미국 투자 확대와 중국 투자 제한을 골자로 한 반도체과학법이 시행된 건 2022년 8월이다. 그 후 1년에 걸쳐 우리 정부와 기업은 피해를 줄이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2023년 9월에 가서야 우리 의견을 어느 정도 반영한 규제 내용이 대략 마무리된다. 진작 입법 과정에서 우리 입장이 어떻게든 반영됐으면 좋았을 것이다. 반도체 수출 규제는 어떤가. 2020년 9월 처음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거의 6개월에 한번씩 새로운 규제가 나왔다. 대상과 방식이 계속 바뀌고, 어떤 건 미 상무부, 어떤 건 재무부 소관이다. 뒤쫓아가기 바빴다.

이 틀을 깨지 않고선 다음 4년도 변화없다. 딱 하나만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든 양국 논의 시점을 앞으로 당기는 일이다. 쉽진 않겠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이 정도는 미국도 받아들일 법하다. 자기들 정책을 바꾸라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규제가 나름 합리적, 현실적으로 도입되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간 한미 논의를 보면 큰 그림에선 같은 입장인데 세부 항목에서 조율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작업이 주로 일이 벌어진 다음 사후적으로 진행됐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오해가 쌓인다. 앞으론 그 논의 시점을 앞당기자.

여태 우리 어려움은 미국발 규제 자체보다 거기 포함된 정리되지 않은 애매함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불확실성만 개선되더라도 우리 고민 상당 부분은 해결된다. 물론 본질적인 입장 차이는 이런 방식으로도 해결은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불필요한 갈등을 줄일 순 있다.

이번 미 대선이 끝나면 승자 진영의 이런저런 사람과 줄을 대기 위해 우리 정부와 기업은 분주할 것이다. 실력자 한마디에 큰 의미를 찾고 희비가 엇갈릴 것이다. 적절치 않다. 품목별 구체적 약속을 기대하거나 선의에 호소해선 의미 있는 성과는 어렵다. 결국은 끌려다닐 것이다. 대신 양국 협의 절차와 방식을 바꾸자고 설득해야 한다. ‘사후 수습형’ 8년에서 벗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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