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日 노벨상 수상 단체의 냉혹한 현실

도쿄/성호철 특파원 2024. 10. 28.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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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피해자 단체인 니혼 히단쿄(일본 원폭피해자 단체 연합)가 202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다음날인 12일 일본 도쿄에서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하마나카 도시코 일본 히단쿄 사무차장, 다나카 테루미 공동의장, 와다 마사코 사무차장, 하마스미 지로 사무차장. /EPA 연합뉴스

지난 25일 오후 일본 도쿄에 있는 낡은 건물 9층의 한 사무실 철제문에는 ‘전쟁은 안 된다. 헌법 9조를 지키자’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헌법 9조는 ‘일본은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는 조문이다. 비좁은 사무실은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과 자료 탓에 취재 온 한국인 기자가 들어갈 공간조차 없어 보였다. 70대로 보이는 일본인이 다가와, “너무 비좁아 죄송하다”며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진 다락방으로 안내했다.

이곳은 지난 11일 올해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일본 원수폭 피해자 단체 협의회(피단협, 일본어 발음 ‘히단쿄’)’의 사무실이다. 피단협은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의 피해자들이 1956년 결성한 조직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의 들뜬 분위기는 없었다. 다락방에서 마주앉은 하마나카 도시코(80) 사무국 차장은 “솔직히 10년 뒤에도 피단협이 존재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현재 47개 지역 조직 가운데 11곳이 해산했거나 활동 중단 상태”라고 했다. 2~3년 내 해산되는 지부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피단협은 멀지 않아 조직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냉혹한 현실에 맞닥뜨린 상태였다. 피폭자들의 고령화 탓이다. 20년 전만 해도 26만명이 넘던 피폭자들은 이제 10만6000여 명으로 줄었다. 생존 피폭자들의 평균 연령은 85세로, 일본 평균 수명인 81세를 넘어선 지 오래다. 피단협은 각 지부의 회원수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조직을 운영할 돈도 부족하다고 했다. 피폭자들이 내는 회비를 올릴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일회성인 노벨평화상 상금 1100만 크로나(약 14억3000만원)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일본 정부도 ‘헌법개정 반대’와 ‘일본의 핵무기금지조약 가입’을 주장하는 피단협에 그리 고운 시선을 보내진 않는다.

한 살 때 피폭당한 하마나카씨는 “아들딸인 피폭자 2세들이 가입하면 좋지만, 당장 50대인 내 딸도 피단협 활동은 안 할 것 같다”고 했다. 일본에선 여전히 ‘피폭자’가 차별의 대상이기 때문에 다들 ‘피폭자 2세, 3세’인 걸 구태여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사이타마현에서 피폭자의 후손이 파혼 위기를 맞는 사건도 있었다고 했다. 결혼을 앞두고 ‘피폭자의 후손’이란 사실을 안 상대 집안이 ‘속였다’며 문제 삼았다.

노벨평화상이 일본에서도 설 자리를 잃어가는 피단협을 살릴 수 있을까. 일본 자민당은 헌법 9조의 개정을 추진하고 있고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핵 공유론을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일본은 핵무기금지조약(TPNW)을 비준하지 않은 국가다.

이런 국제정치 현실에서 피단협의 이번 수상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잊는 우매한 인간에게, 과연 이번 노벨상 수상은 경고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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