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번역가가 베트남의 ‘恨’은 다르다고 한 이유 [사이공모닝]

이미지 기자 2024. 10. 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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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처음 베트남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야말로 우당탕탕거리며 베트남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는게 취미입니다. <두 얼굴의 베트남-뜻 밖의 기회와 낯선 위험의 비즈니스>라는 책도 썼지요. 우리에게 ‘사이공’으로 익숙한 베트남 호찌민에서 오토바이 소음을 들으며 맞는 아침을 좋아했습니다. ‘사이공 모닝’을 통해 제가 좋아하던 베트남의 이모저모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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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전해진 뒤 베트남에서도 한강 작가 붐이 일었습니다. 지난 2010년 베트남에 소개된 소설 ‘채식주의자’는 이미 품절 사태를 빚었죠. 채식주의자뿐 아닙니다. 베트남에 번역돼 소개된 ‘소년이 온다’와 ‘흰’ 역시 서점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한국처럼 출판사가 긴급히 증쇄 발표를 하기도 했지요.

베트남에서 판매 중인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표지.

베트남에 한강 작가의 작품이 소개된 것은 2010년, 황하이번(Hoàng Hải Vân) 번역가를 통해서입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 과정 중이던 황 번역가가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집에서 한강 작가의 몽고반점을 읽고, 그의 작품을 번역해 내놓자고 베트남 출판사에 제안했던 거죠.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는 영국인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가 영미권에 그의 작품을 소개해 한강 작가가 맨부커상을 받은 게 2016년입니다. 그보다 6년 전, 한강 작가의 작품을 베트남에 소개한 거죠. 한강 작가의 작품을 해외에 소개한 첫 번역가이기도 합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한 작가’였던 그의 작품을 소개하게 된 계기는 뭐였을까요? 황 번역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몽고반점을 읽을 때만 해도 내용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럼에도 책장을 덮지 못하고 끝까지 읽어내려갔지요. 매혹적이고, 예술적이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집착이었달까?”

자신이 번역한 책을 들고 기념 사진 촬영 중인 황하이번 번역가. /본인 제공

황 번역가와의 인터뷰는 지난 2주간 각각 한 번의 서면 인터뷰와 전화 인터뷰, 수차례의 추가 질의응답을 거쳐 진행됐습니다.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에 맞춰 각 언론사의 취재 요청이 쏟아지는 걸 알고 있어 그의 인터뷰를 빠르게 전해 드려야 하나 고민했지만 여기는 우리가 몰랐던 베트남을 소개하는 <사이공 모닝>. 쏟아지는 강연 요청에 바쁜 그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더 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제가 꼭 묻고 싶던 질문이 있었거든요.

◇채식이 아닌 폭력에 대한 저항

베트남 출판사들이 한강 작가의 작품을 흔쾌히 받아들였을까요? 대답은 노(No)입니다. 당연합니다. 2010년만 해도 베트남 서점에 소개된 아시아 작품은 중국·일본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스마트폰 보급률이 높은 베트남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딱 한 번 베트남에서 한국 책을 읽는 학생을 본 적 있는데, 그가 읽고 있던 책은 고(故)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였습니다. 실용서를 읽는 사람은 봤지만 한국 문학 작품을 읽는 사람은 보질 못 했었지요.

/본인 제공

황 번역가는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채식주의자’를 소개했습니다. 그는 “한강 작가의 작품이 어디서나 쉽게 받아들여질 작품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슬프고, 어두운 작품을 끝까지 읽고 그 내면을 이해하려는 독자만 좋아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베트남의 경우 한국과 유사한 역사가 있고, 유교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런 감정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소설 ‘채식주의자’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는 육식을 거부하는 딸이자 주인공 영혜의 입에 억지로 고기를 쑤셔 넣습니다. 채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영혜는 손목을 긋는 극단적 시도를 하죠. 베트남에서는 음력 1인과 15일엔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길거리 식당부터 고급 레스토랑까지 채식 식당이 흔하디흔하지요. ‘채식’으로 시작된 가족 간 갈등 자체가 이해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황 번역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채식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를 고발한 대표적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영혜가 왜 채식을 하게 됐는지 알아보기보단 남편과 아버지가 그들의 뜻대로 영혜의 행동을 강제하는 장면인 거죠. 습관적 폭력과 가부장제 행위의 피해자로 영혜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트남 ‘응어이 안 차이’

그는 작년 번역 관련 세미나에서 채식주의자 번역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때로는 차분하고 느린, 때로는 차갑고 태연스러워서 당황스러운, 때로는 불타는 욕망처럼 열렬하고, 때로는 소름 끼치도록 괴기한 분위기와 이야기의 리듬을 전달하기 위해 몇번이고 눈을 감고 생각을 곱씹었습니다.”

/본인 제공

그가 눈을 감고 생각을 곱씹으며 번역한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싸늘한 복도를 건너 아이 방의 침대까지 가는 길은 멀게 느껴졌다. 다섯살인 아이는 아직 손을 빨았다. 옮기는 사이에 잠이 옅어졌는지 침대에 눕히고 나자 쪽, 쪽 손가락 빠는 소리가 어두운 방 가운데 적요했다.” <채식주의자 중>

한국의 ‘적요함’을 어떻게 베트남어로 전달을 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베트남어로는 적요함보다 고요함이 더 잘 어울렸다고 합니다. 고독(cô độc)과 고요(cô liêu) 중 고요가 선택됐습니다. 아기가 손가락을 빠는 소리는 chùn chụt과 chụt chụt 중에 고민했다고 해요.

이렇게 번역된 책은 베트남에서 응어이 안 차이(Người ăn chay)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말 그대로 채식주의자이지요.

◇한국과 베트남의 한이 다른 이유

베트남을 다녀온 사람들이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과 비슷하다’는 것이지요. 황 번역가 역시 “유교 문화와 한자 문화권으로 가부장제, 장유유서 등 가정적 환경을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점, 큰 나라 옆에서 전쟁과 분단으로 늘 투쟁하고 싸워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점이 비슷하다”고 말했습니다. 엉덩이에 있는 몽고반점 역시 비슷하다고 말했지요.

하지만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형성된 ‘한’(恨)의 정서는 우리만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침략과 전쟁의 역사 속에서 한국은 한이라는 정서가 뚜렷하게 형성된 반면, 베트남의 그것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한국과 다른 느낌이거든요. 그래서 꼭 묻고 싶었습니다. “베트남과 한국의 정서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은 뭘까요?”

베트남 호찌민의 책 거리. 서점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이다. /온라인캡처

몇 번의 질의응답을 거쳐 연결된 통화에서 그가 말했습니다. “정(情)의 정서는 비슷한 반면, 한(恨)의 정서는 굉장히 다릅니다.” 대체 왜 그럴까요? 황 번역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국 문학의 가장 기본적 요소가 한이라면 베트남 문학 작품에서는 한을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굉장히 희미하죠. 아픈 역사를 겪은 것은 똑같지만 ‘만날 역사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발전할 수 없다’는 인식이 베트남 사람들 사이에선 강합니다.”

한국인으로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정서를 공유하는 게 한국이니까요. 그는 말했습니다. “베트남은 중국, 프랑스, 미국 같은 세계 강대국에 침략을 많았습니다. 작은 나라였으니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미국을 이긴 나라, 그 과정에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지킨 나라라는 자부심이 있어요. 아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승리의 역사를 기억하는 자부심과 자존심이 베트남의 기본 정서이지요.”

그는 채식주의자를 번역하고 있던 2009년, 한강 작가를 만났었다고 합니다. “채식주의자냐”는 질문에 “아니요”라며 크게 웃었다고 해요. 조용하고, 차분한 겉모습 속에 심오하고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는 평도 남겼습니다.

베트남에서도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흥행 궤도를 달립니다. 요즘은 번역 활동보다 회사 생활에 집중하고 있다는 황 번역가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호찌민과 다낭 등 전국을 다니며 바쁘게 강연을 다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한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폭력을 인지하고 나면, 폭력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무얼 해야 할지도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이 채식주의자가 가진 가장 깊은 인간적 가치이지요.” 최근 마주한 폭력은 무엇인지,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어떤 걸 고민했는지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황 번역가는 “한국 문학의 매력이 베트남에도 알려지고 있다”며 “우리에게도 언젠가 이런 영광스러운 일이 생기겠죠”라고 웃었습니다. 조만간 베트남 서점이나 책 거리를 가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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