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헌금 스캔들·고물가·증세 … 日 성난 민심이 집권당 심판
이상기후 여파 쌀값 두배 껑충
자민당 15년만에 최대 위기
연정 파트너 찾아야 정권 유지
이시바 "민의 엄중하게 수용"
◆ 日 자민당 참패 ◆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은 2012년 중의원 총선거를 포함해 최근 4번의 총선에서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놓치지 않았던 자민당이 27일 총선에서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였다.
연립 여당인 공명당과 힘을 합쳐도 정권을 끌고 갈 수 있는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 것이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출구조사 이후 NHK 인터뷰에서 "엄중한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고 민의를 받아들인다"며 "추가 연정 등은 아직 결정된 바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비자금 스캔들과 고물가, 증세 등과 관련한 국민적 불만을 가볍게 생각한 자민당이 구태의연한 정책을 이어간 결과가 이번 선거에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일본은 이날 전국 소선거구(지역구) 289석과 11개 권역의 비례대표 176석 등 총 465석의 중의원을 뽑는 총선거를 치렀다. 이날 오전 7시~오후 8시 일본 전역 4만5000여 개 투표소에서 투표가 진행됐다. 중의원 총선거는 2021년 10월 이후 3년 만이다.
NHK는 출구조사를 통해 집권 자민당의 의석수를 153~219석으로 예상했고, 공명당은 21~35석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후 개표상황을 보면 자민·공명 연립여당이 과반수인 233석을 차지하는 것은 어렵게 됐다.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은 다수의 의석수를 가진 당에서 총리를 배출하는 구조다. 총리 선출을 위해서는 최소 과반 의석이 필요한데, 연립 여당이 이마저도 충족하지 못한 것이다. 중의원 선거를 고시한 15일만 해도 자민당은 247석, 공명당 32석으로 양 당 합쳐 279석을 갖고 있었다.
니시노 준야 게이오대 법학부 교수는 "자민당과 공명당이 합친 의석이 절반을 넘지 못하면 결국 추가 연정밖에 답이 없다"며 "가뜩이나 당내 지지기반이 취약한 이시바 총리인데 더욱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져 본인의 정책을 자신 있게 추진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반면 최대 야당인 입헌민주당을 포함한 야당은 크게 약진하면서 정권교체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1955년 자민당 출범 이후 처음으로 정권이 교체된 1993년 총선 때가 재현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당시 총선에서 자민당은 223석으로 1당에 올랐지만, 과반 의석인 256석에는 한참 모자랐다. 이를 틈 타 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등 7곳 야당이 연립해 총리를 배출하면서 자민당은 처음으로 야당으로 밀려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자민당 선거 실패의 첫 번째 요인으로 비자금 스캔들에 대한 안이한 대처를 꼽았다. 지난해 아베파에서 촉발된 비자금 스캔들은 자민당 파벌이 정치자금 모금 행사인 '파티'를 통해 모은 자금 일부를 비자금 형태로 의원에게 돌려준 것이 적발되면서 촉발됐다.
문제는 12명 가운데 9명이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사실상 공천만 안 했다뿐이지 퇴로를 열어줬다는 비난을 받았다. 여기에 자민당 내부에서 무소속 출마자가 당선될 경우 자민당 내부 영입 의사를 밝히면서 사실상 '우회 공천'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여기에 지난 16일 자민당 본부가 비자금 문제로 공천하지 않은 출마자가 대표를 맡은 당 지부에 '활동비' 명목으로 2000만엔을 지급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또 다른 악재가 됐다.
팍팍한 가계 살림살이도 자민당 정권에 부담이 됐다. 일본 소비자물가(신선식품 제외)는 지난해 41년 만에 3%대를 기록한 데 이어 지난 9월에도 2.4%를 기록하는 등 꾸준히 2~3%대에 머물고 있다.
고물가에 대응하기 위해 전임 기시다 후미오 총리 때부터 임금인상에 공을 들였지만 물가 변동을 감안한 실질 임금은 여전히 마이너스를 이어갔다. 특히 실질임금은 2022년 4월 이후 올해 5월까지 26개월 연속 감소세를 보이며 사실상 임금 인상 효과를 상쇄시켰다. 지난 6월과 7월은 여름 보너스 효과 등으로 소폭 반전했다가 8월에는 전년 동기 대비 0.6% 줄며 3개월 만에 감소세로 전환됐다.
여기에 최근 이상 기후에 일부 사재기가 겹치며 쌀 값이 전년 동기 대비 두 배 가까이 오르는 가운데, 쌀 품귀현상마저 벌어진 것도 국민 분노로 이어졌다. 쌀 공급은 9월부터 햅쌀이 출하되면서 진정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주요 마트 등에서 과거처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또 기시다 정권 때부터 이어온 증세도 정권 심판의 촉매제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안경을 쓴 기시다 전 총리에게 '증세 안경'이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최근 2~3년간 국민이 받아들이는 세금 문제는 컸다.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 이시바 총리는 당장 자민당의 정권 유지를 위해 새로운 정당의 연정 참여나 협력 모색에 나서야 하게 됐다. 총리를 지명하는 특별국회는 헌법 규정에 따라 투표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소집된다.
모리야마 히로시 자민당 간사장도 지난 20일 NHK에 출연해 일반론임을 전제하긴 했지만, 총선 이후 자민당과 공명당의 연립정권 틀을 확대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자민당 내에서는 정책 방향성이 유사한 일본유신회나 국민민주당이 새로운 연정 파트너로 거론되고 있다. 문제는 양 당이 자민당 정치개혁에 비판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어 협의가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도쿄 이승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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