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보다 무서운 게 경제제재”… 1차대전 ‘물자 봉쇄’로 90만 사망[권오상의 전쟁으로 읽는 경제]
영국, 1800∼1914년 66차례 전쟁
동맹국이 佛-러 등 공격하게 하는 ‘대리전’ 전략으로 자국 피해 줄여
1차대전 시작되자 ‘봉쇄장관’ 임명… ‘자유항행’ 국제원칙 깨고 봉쇄령
기아-질병 인한 각국 사망자 속출
나폴레옹을 상대한 영국의 핵심 전략은 ‘남의 손으로 코 풀기’였다. 쉽게 말해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고 그 나라의 군대로 프랑스를 공격하게 만드는 거였다. 이름하여 ‘대리전’이었다.
영국의 부추김에 넘어간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은 1815년까지 각각 약 110만 명, 85만 명, 4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들을 차례로 상대해야 했던 프랑스도 결국 2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났다. 같은 기간 영국의 사상자는 30만 명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버는 꼴이었다.
프랑스를 무릎 꿇린 영국의 다음 목표는 러시아였다. 영국의 수법은 이전과 같았다. 1853년 영국의 군사적 지원 약속을 받은 튀르키예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1856년 크림전쟁이 러시아의 패배로 끝날 때까지 러시아군은 45만 명이 목숨을 잃은 반면 영국군의 사망자는 2만 명대였다.
러시아의 힘은 한 번의 패배로 소진될 게 아니었다. 1902년 영국은 동양의 후미진 곳에 위치한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든든한 뒷배가 생긴 일본은 1904년 2월 역시 영국처럼 선전포고 전에 뤼순의 러시아 극동 함대를 기습하며 전쟁을 개시했다. 1905년 5월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 함대를 분쇄한 일본 연합 함대의 전함 네 척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가 탄 기함 미카사를 비롯해 모두 영국이 만들어 준 거였다.
대리전은 완벽한 방법은 아니었다. 대리로서 전쟁을 치르는 쪽이 딴마음을 먹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경제학은 이를 ‘주인-대리인 문제’라고 부른다. 실제로 1941년 일본은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를 침공했다. 2001년 세계무역센터로 날아든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는 1988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 상대의 대리전을 치르려고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프로이센은 1871년 독일 통일에 성공했다.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이 거슬렸던 영국은 작업을 시작했다. 남의 피와 살로 독일의 힘을 빼려고 프랑스와 러시아를 꼬드겼지만 여의치 않았다. 영국의 수법을 훤히 꿰고 있던 독일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영국과의 전쟁에 말려드는 걸 노련하게 피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1888년 황제가 된 빌헬름 2세는 엄격했던 영국인 엄마를 미워한 만큼 영국에 지지 않겠다는 열등감이 있었다. 빌헬름 2세의 외할머니가 바로 당시 영국의 여왕 빅토리아였다. 1890년 비스마르크를 해임한 빌헬름 2세는 이후 프랑스와 러시아를 모두 적으로 돌리는 아둔한 외교를 벌였다. 비스마르크가 그토록 피하려던 시나리오였다. 1914년의 전쟁은 당연한 귀결일 뿐이었다.
1차 세계대전을 맞이한 영국은 대리전 말고도 준비된 게 더 있었다. 바로 봉쇄였다. 봉쇄란 적국으로 오가는 모든 물자를 막는 걸 가리켰다. 1차 대전이 시작되자 영국은 봉쇄 장관과 봉쇄부를 신설했다.
봉쇄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었다. 기원전 5세기의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는 아테네가 메가라를 봉쇄한 이야기가 나온다. 1806년 11월 나폴레옹이 유럽 국가들의 대영국 수출을 금지한 대륙 봉쇄를 아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는 1806년 5월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항구를 봉쇄한 탓이었다.
1차 대전의 봉쇄는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사실 아테네의 메가라 봉쇄는 델로스 동맹국에 메가라 사람이 오지 못하도록 한 게 전부였다. 반면 영국 봉쇄부의 소령으로 나중에 영국 해군의 공식 봉쇄 역사서를 쓴 윌리엄 아널드포스터는 “적이 아기를 낳고 싶지 않게 만들고, 그럼에도 아기가 태어난다면 죽은 채로 태어나는 궁핍한 상황을 의도했다”고 인정했다.
1차 대전은 항공기와 독가스 같은 신무기의 각축장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심리적 무기에 가까웠다. 가령 독일 비행선의 폭격은 영국과 대륙을 합쳐 2000명 정도의 사망자를 낳았다. 독가스는 군인 전사자 120만 명 중 9만 명의 죽음에만 책임이 있었다.
1차 대전 직후 봉쇄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바로 경제 제재였다. 1919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제재를 “전쟁보다 더 엄청난 것”이라고 평가했다. 군사적 무기보다 더 효과가 큰 공격 수단이라는 의미였다. 윌슨은 집단의 행위를 경제적 인센티브로 형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윌슨에게 이상적인 민주 시민이란 곧 돈이 전부인 호모 에코노미쿠스였다.
제재는 두 가지의 오랜 국제 원칙과 충돌했다. 바로 바다의 자유와 중립이었다. 가령 1568년부터 1648년까지 벌어진 네덜란드 독립전쟁 때 네덜란드 상인들은 에스파냐에 물건을 팔았다. 무역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지킬 국부를 쌓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유 항행과 중립 무역으로 대변되는 상업의 논리는 예전에는 전쟁의 논리 위에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 제재의 논리에 패했다.
러시아 태생의 하임 바이츠만은 독일과 스위스에서 유기 화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1910년 영국 국적을 취득한 바이츠만은 합성 고무를 만들려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아세톤 제조법을 발견했다. 영국은 1916년 바이츠만을 영국 해군 연구소장으로 임명해 포탄 위기를 넘겼다. 1948년 바이츠만은 근동에서 영국의 이익을 대리할 신생 국가로 낙점된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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