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정년 연장이 꺼내든 숙제

이주영 기자 2024. 10. 27.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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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임원으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한 70세 벤은 삶을 바삐 보내려 애쓴다. 세계 여행을 다니고 요가, 요리, 중국어도 배웠다. 그러다 “삶에 난 구멍을 채우고 싶다”며 한 인터넷 의류업체의 인턴사원으로 재취업한다. 편하게 입고 다녀도 된다는 사장 말에도 “정장이 편하다”며 양복에 넥타이 차림을 고수한다. 사장은 처음엔 선입견을 갖고 별 기대를 안 했지만 벤의 연륜과 노하우, 처세술에 점점 신뢰를 갖는다. 벤은 연애 상담이나 옷차림 조언을 해주는 등 젊은 동료들과도 격의 없이 지낸다. 영화 <인턴>의 주인공 이야기다.

흰머리에 주름이 가득하지만 인생 선배로서 멋지게 조직생활을 하는 벤 같은 사람을 영화에서 볼 순 있어도 현실에서 만나는 일은 드물다. 인구 구조가 바뀌면서 60·70대에도 일하는 사람이 늘었지만, 이들의 직장생활은 벤과는 많이 다른 게 현실이다.

취업 상태인 60세 이상 인구가 지난달 675만명에 달하며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전 연령대를 통틀어 취업인구가 가장 많다. 20대 취업자 수가 357만명으로 절반 남짓에 불과한 것과 대조적이다. 55~79세의 경제활동참가율은 60.6%로 역대 최고다.

정년퇴직 연령인 60세 이후에도 일터를 떠나지 못하는 건 벤처럼 자아 실현을 위한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는 돈을 벌기 위해서다. 자녀 교육비나 집값이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인 한국에서 평생을 열심히 일했어도 정작 여유롭고 안정적인 노후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통계청에 따르면 고령인구 중 연금을 받는 사람은 절반 남짓에 불과하다. 이들의 평균 연금 수령액은 월 82만원으로 1인 가구 최저생계비(약 125만원)에 크게 미달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이다. 이 때문에 고령층 10명 중 7명은 계속 일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노인 일자리의 대부분은 단기 일자리, 단순 노무직 등 불안정한 형태에 몰려 있다.

저출생·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된 한국은 생산연령인구가 줄면서 국가 경제의 기초체력도 하향 추세를 보이고 있다. OECD가 추정한 올해 한국의 잠재성장률(2.0%)은 우리보다 소득 수준이 두 배 이상 높은 미국(2.1%)보다 낮다. 고령층이 더 오래 일을 한다면 노동력 감소를 완충하는 효과가 있고, 소득 증가로 소비 여력이 커지면 내수 활성화에도 도움이 된다.

최근 행정안전부가 공무직 노동자들의 정년을 65세로 연장한 데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높다. 전국의 정부청사에서 시설관리와 환경미화 업무 등을 담당하는 2300명이 대상이다. 대구시도 공무직 412명의 정년을 65세까지 늘리기로 했다. 대한노인회는 현재 65세인 노인 연령을 매년 1년씩 늘려 75세로 올리자는 제안을 내놨다. 관련 논의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년 연장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무시할 수 없다. 정년 연장이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가중시켜 결과적으로 청년 일자리를 줄일 수 있다는 게 대표적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들도 있다. KDI 정책포럼에 따르면 고용원 수가 10~999인 규모의 사업체에서 고령자 1명의 정년을 연장했을 때 20대 이하 고용은 0.2명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6년부터 60세 정년이 법적으로 의무화된 이후 청년 고용이 16%가량 줄었다는 한국노동연구원 분석도 있다.

결국은 고령층이 원하는 만큼 더 오래 일할 수 있게 하면서도 청년 고용에는 타격을 주지 않는 묘수를 찾아내는 게 핵심이다. 이미 국내 일부 대기업과 해외에서 하고 있는 퇴직 후 재고용이나 퇴직자에 대한 전직 지원 등의 사례도 충분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연공서열형 임금체계를 직무·성과 중심으로 전환하도록 하는 제도 설계도 필수다.

특히 소수의 좋은 일자리를 두고 고령층과 청년층이 제로섬 게임에 빠지지 않도록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근로여건이나 사업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중소기업의 경우 지금도 정년 이전에 회사를 관두는 경우가 많다. 이런 기업들의 근로조건을 끌어올리고, 필요하다면 정부 지원을 늘리는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내년이면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찍으며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게 된다. 안정적인 노후를 보장하고 사회적 비용과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논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이주영 경제부문장

이주영 경제부문장 young7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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