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지리산에서 만난 사람들
트레일 조성 노하우 공유…가을향 물씬 숲길도 만끽
이맘때면 지리산은 주 능선에서 절정을 이룬 단풍이 차츰 낮은 자락으로 내려오며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화려하기로야 단풍나무에 비할 수 없지만 수수한 갈색의 참나무류와 느티나무 단풍이 지리산을 배경으로 이웃한 마을과 마을을 감싼다. 고즈넉한 마을 입구에는 노거수가 발걸음을 옮기는 낯선 이들을 맞는다. 숱한 봉우리와 골짜기, 마을과 사람을 품고 있으며 단순히 크고 넓고 깊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산이 지리산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이며 또한 우리나라 대표 트레일 코스 중 하나인 지리산 둘레길을 품은 가을 지리산에서 ‘걷기’를 매개로 한 아시아인의 축제의 장이 펼쳐졌다. 10월의 마지막 주인 지난 25~27일 전남 구례군을 중심으로 지리산 둘레길 일대에서 아시아 트레일즈 네트워크(ATN) 회원단체들과 일반 동호인이 참여하는 제5회 아시아 트레일즈 콘퍼런스(ATC)와 지리산 둘레길 걷기 축제가 열렸다. ATC는 ATN 회원 단체들이 한자리에 모여 연대하며 걷기와 트레일 관리에 관한 경험과 정보를 나누는 자리다. 앞서 부산에서도 열려 친숙한 행사다. 2014년 초 ATN이 발족하고 제주에서 첫 콘퍼런스가 열린 이후 2015년 일본 돗토리현, 2019년 부산에 이어 2022년에는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렸고 이번에 5년 만에 다시 국내에서 행사가 열렸다.
이번 행사는 ‘길이 우리에게 준 것, 우리가 길에 줄 것’을 슬로건으로 생물 다양성 보존과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트레일 운영관리,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 트레일 프로그램, 민관·국제협력 정책을 논의했다. 인간이 하는 다양한 행위 가운데 가장 친환경적인 행위인 걷기가 매개인 행사인 만큼 서로 지구의 현재와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첫 번째 세션인 ‘국가숲길의 지속 가능한 운영을 위한 민관협력 정책’에서는 미국 국립 트레일 시스템과 한국 국가숲길에서 이뤄진 민관 협력 사례를 각각 살펴봤고 두 번째 세션 ‘성공적인 숲길 운영 관리를 위한 다양한 협력 모델’에서는 아시아산림협력기구(AFoCO)의 산림 복원 파트너십과 사용하지 않는 철도 트랙을 활용한 미국의 다목적 트레일 조성 사례를 소개했다.
이어진 세션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야외 활동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트레일 관리에서 자연보전과의 조화와 생태 책임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다. 콘퍼런스의 주제에 맞춰 부대행사로 참가한 회원단체들은 운영·관리하는 트레일을 홍보하는 부스에서 각 트레일을 대표하는 생물종을 소개하며 단순히 길을 걷기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길이 품은 자연환경과 생태에 관한 관심을 높였다.
지역성을 또렷하게 담은 지리산 숲길 탐험대도 큰 호응을 받았다. 지금, 이곳에서만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개성 넘치는 프로그램이었다. 지리산권역 6개 시·군 가운데 지리산 둘레길 걷기축제가 열린 구례군을 제외한 나머지 경남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 전북 남원시 장수군 등 5개 시·군에서 모두 9명의 지역 주민 탐험대장이 직접 발굴한 가을 냄새 물씬 풍기는 숲길과 마을 길을 함께 걸으며 지역의 사람과 역사, 자연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번 ATC에 앞서 열린 ATN 총회에서는 회원단체들이 지리적 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교류를 확대하고 다른 국가 트레일 방문을 유도하기 위한 ATN 패스포트 개정도 논의했다. ATN 패스포트는 아시아 각국 회원단체가 관리하는 트레일을 모두 걷고 스탬프를 찍으면 인증서와 기념품 등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부산의 갈맷길은 물론 제주올레 등 국내 트레일 대부분이 시행하는 방식이다. 이를 아시아로 확대한 것이 ATN 패스포트인데 첫 제작 이후 회원 단체가 늘어나며 새로운 패스포트 제작의 필요성이 대두된 데 따라 개정판 제작이 의제로 제시됐다. 이번 ATC에서는 국내 트레일 관련 단체가 모인 ㈔한국걷는길연합도 회원 단체의 트레일 중 대표 코스 2개씩을 수록한 패스포트를 제작해 처음으로 선보였다. 국내 각지의 트레일을 홍보하는 것은 물론 스탬프 투어를 위해 걷기 동호인들이 각 지역을 방문하면 관광 활성화 효과도 기대된다.
무엇보다도 이번 ATC의 가치는 전 지구적 생물 다양성 위협과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경을 뛰어넘어 길과 걷기를 매개로 해서 민과 관을 아우르는 협력과 연대의 분위기를 북돋웠다는 데 있다. 교류와 협력을 주 가치로 하는 ATN 회원 단체의 증가도 고무적이다. 하나의 길은 일차원적인 선이다. 하지만 이차원의 길이 다른 길과 만남을 거듭하면 선은 그물이 된다. 길에서 만나는, 길을 매개로 만나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길 걷기와 관련한 국내 단체끼리 만나고 나아가 아시아, 세계 길 걷기 단체가 만나면서 연대와 우호의 그물망은 더욱 촘촘해지길 기대한다.
이진규 편집국 부국장 겸 ㈔걷고싶은부산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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