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을 유혹하는 금단의 보물창고 ‘로지코믹스’

한겨레 2024. 10. 2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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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많은 책들을 왜 지고 다니는 것일까? 부모님 집을 나와서 점점 불어나던 책들.

책 창고에 맡겼다가 집이 좁아 찾지 못했던 브리태니커와 아메리카나 백과사전은 아마도 도서관의 참고 열람실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요즘은 헌책 받아주는 도서관이 없는데, 다행히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터이니 그 녀석들 떠나보낸 것이 서운하지 않다.

나는 책등과 표지, 그리고 그것이 차지한 부피를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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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주일우의 뒹굴뒹굴 만화
로지코믹스

나는 이 많은 책들을 왜 지고 다니는 것일까? 부모님 집을 나와서 점점 불어나던 책들. 물 건너가 공부할 때도 지고 다녔다. 책 짐이 무겁다 보니 책 때문에 들은 핀잔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가지고 있던 책들 중 한 덩이는 대학교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책 창고에 맡겼다가 집이 좁아 찾지 못했던 브리태니커와 아메리카나 백과사전은 아마도 도서관의 참고 열람실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공부하시던 책도 같이 흘러들어갔는데 새로 문을 열었던 교육박물관으로 들어갔다고 들었다. 요즘은 헌책 받아주는 도서관이 없는데, 다행히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터이니 그 녀석들 떠나보낸 것이 서운하지 않다. 그 밖에는 사들인 녀석들 중 부러 떠나보낸 녀석들은 없다.

사정이 이러니 책은 계속 불어나고 사무실과 집에 책 둘 곳이 모자란다. 깔끔하게 정리하려면 버려서 공간을 만드는 수밖에 없는데 버리질 못하니 상황을 개선할 도리가 없다. 주변에 책을 버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내가 아깝다. 둘 곳만 있으면 내가 챙겨 올 텐데. 내가 아는 문학평론가는 꾸준히 책을 스캔해서 파일로 저장하고 책을 버리는데 나는 그 처리 방법에 동의가 안 된다. 책의 내용이 파일로 있으면 뭐 하나. 나는 책등과 표지, 그리고 그것이 차지한 부피를 기억하고 싶다. 내가 아는 철학자는 책을 그냥 버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아아, 이것도 할 짓이 못 된다. 어떻게 떠나보낼 놈들을 골라낼 수 있단 말인가? 눈 감고 무작위로 뽑을 수도 있겠지만 눈 뜨고 발견한 빈자리에 기함할지도 모른다.

사정이 이러니, 월세방 이사 다니면서도 바리바리 싸서 책을 옮긴다. 여러번 옮기다 보니 책들이 섞인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조합으로 쌓인 책등을 외우고 어색한 조합 속에서 엉뚱한 상상을 이끌어내는 것도 재미가 작지 않다. 이번에 새로 옮긴 사무실에 책장을 더 마련하고 책들에게 겨우 자리를 잡아 주어 흡족한데, 금방 늘어나는 책들이 또 책을 가리기 시작하니 금방 엉망이 될 터.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서재에서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이 책을 다 읽으셨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나도 위대한 생각들 틈에 있는 게 좋단다.” 나도 그렇다.

러셀이 ‘진리’ 혹은 ‘진실’을 찾기 위해 바친 일생을 그린 ‘로지코믹스’. 러셀의 지적 여정은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시작했다. 원래 이 서재는 엄한 할머니가 정한 ‘금지구역’ 목록의 맨 위에 있었다. 할머니가 집을 비웠을 때, 할아버지가 안내한 서재는 보물창고였다. 러셀은 그 자리에서 할아버지의 꼬임에 빠졌다. 할머니는 앎의 열매를 따먹지 말아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금단의 문을 지키는 수문장을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앎의 열매를 먹으라고 유혹하는 뱀이었다. 서재에는 과학의 진실도, 어릴 때 잃은 부모님의 진실도 보관되어 있었다. 가족의 비극을 마주했을 때 러셀은 이렇게 고백했다. “철저히 논리적인 세계를 수학에서 얼핏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그때 그 자리에서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진리의 토대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논리학 연구에 매진했지만, 논리학의 토대 없음을 공표해버린 러셀. 하지만 러셀은 헐겁더라도 논리학의 토대를 다시 만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잡을 수 없는 꿈을 꾸면서도 허무나 비합리에 빠지지 않았다. 그 힘은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얻었을 것이라 믿는다.

만화 애호가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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