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FA 흔든 ‘디아라 판결’…10兆 축구 이적시장 ‘대변혁’ 예고 [허란의 판례 읽기]

2024. 10. 27.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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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법 위반 판단 받은 FIFA 3대 족쇄
“선수 이동자유 막고 구단 간 경쟁 제한”

[법알못 판례 읽기]

전 프랑스 국가대표 미드필더 라사나 디아라. 사진=AP·연합뉴스



“축구선수의 이직의 자유가 FIFA 규정으로 과도하게 제한돼서는 안 된다.”

유럽사법재판소(ECJ)가 10월 4일(현지 시간) 내린 예비판결의 핵심이다. ECJ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선수 이적 제한 규정이 유럽연합(EU)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1995년 ‘보스만 판결’ 이후 축구계 최대 격변을 예고하는 판결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이 10조원 규모의 글로벌 축구 이적시장을 근본적으로 재편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황금기 날린 디아라의 반발

이번 판결의 주인공은 프랑스 출신 미드필더 라사나 디아라다. 디아라는 2013년 러시아 명문 로코모티프 모스크바와 계약했다. 하지만 급여 삭감 등의 문제로 구단과 갈등 끝에 1년 만에 계약이 해지됐고 FIFA 분쟁해결기구(DRC)는 디아라에게 1050만 유로(약 150억원)의 손해배상 판정을 내렸다.

문제는 그 후였다. 벨기에 1부 리그의 로얄 샤를루아가 디아라 영입을 추진했으나 FIFA와 벨기에 축구협회가 새 구단의 연대책임 면제를 보장하지 않자 계약이 무산됐다.

FIFA는 ‘정당한 사유’ 없이 계약이 조기 해지된 경우에는 FIFA의 현행 규정(RSTP)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아라는 1년 넘게 새 팀을 구하지 못했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 선수 경력의 황금기를 허비해야 했다.

디아라는 FIFA와 벨기에 축구협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벨기에 1심 법원은 양 협회에 600만 유로의 배상을 명령했다. 항소심에서 벨기에 법원은 ECJ에 FIFA 규정의 EU법 위반 여부에 대한 판단을 요청했다.

 

 “과도한 족쇄” 판단한 ECJ

ECJ는 FIFA의 ‘선수 신분 및 이적에 관한 규정(RSTP)’ 제17조가 EU법이 보장하는 ‘노동자 이동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문제가 된 조항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손해배상액 산정 기준이다. FIFA는 선수가 계약을 위반해 다른 팀으로 이적할 경우 새 구단과 맺은 계약의 보수와 이전 구단이 지출한 이적료까지 손해배상액에 포함시켰다. ECJ는 “이는 과도한 기준”이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실제 손해와 무관한 요소들까지 배상액에 포함시키는 것은 선수의 이동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둘째, 새 구단의 연대책임 조항이다. FIFA는 계약을 위반한 선수를 영입한 구단에 일률적으로 손해배상 연대책임을 지웠다. ECJ는 “구체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일괄적 책임 부과는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재판부는 “선수 영입 과정에서 어떠한 불법적 개입도 하지 않은 구단까지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은 비례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셋째, 구단의 유인 간주 규정이다. FIFA는 계약 위반 선수를 영입한 구단이 이를 유인한 것으로 간주해 2회 연속 이적시장 참가 금지 등 제재를 가했다. ECJ는 “유인 사실은 FIFA가 입증해야 한다”고 밝혔다. 법원은 “입증 책임의 전환은 법치주의 원칙상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구단 간 담합이었다”

ECJ는 FIFA 규정이 EU 경쟁법도 위반했다고 봤다. 재판부는 “선수단 안정성을 위해 계약기간 중 이적을 제한할 수는 있다”면서도 “현행 규정은 구단 간 경쟁을 과도하게 제한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ECJ가 FIFA의 규정을 ‘구단 간 스카우트 금지 협정’(non-poaching agreements)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FIFA 규정이 겉으로는 공격적인 영입을 막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구단들이 서로 선수를 데려가지 않기로 하는 담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는 “각국의 시장을 인위적으로 분할해 모든 구단의 이익을 보장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ECJ는 이러한 제한이 “일반적이고, 절대적이며, 영구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강조했다. “계약법상 일반적인 손해배상 제도만으로도 충분히 선수단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데 FIFA는 과도한 제한을 가했다”는 설명이다.

 

 축구계 대변혁 예고

법조계는 이번 판결이 전 세계 축구 이적시장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한다. FIFA 에이전트 자격을 보유한 정유성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1995년 보스만 판결이 계약 만료 후 자유이적(FA)을 가져왔다면 이번 판결은 계약 중도해지 시 선수의 권리를 대폭 강화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이번 판결의 핵심은 FIFA가 그동안 당연시해온 여러 가정을 법적으로 부정했다는 점”이라며 “새 구단의 유인을 추정하거나 선수의 시장가치 상승분을 손해배상액에 포함시키는 등의 관행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가장 큰 변화는 손해배상액 산정 방식이다. 스포츠중재재판소(CAS)는 그동안 새 구단 계약금과 이전 구단 지출 이적료까지 손해배상액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향후에는 ‘잔여 연봉’이 주된 기준이 될 전망이다.

구단의 연대책임도 완화된다. 정 변호사는 “새 구단이 선수의 계약 위반을 유인하지 않았다면 책임을 지지 않게 될 것”이라며 “구단들의 선수 영입이 훨씬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축구계는 이번 판결로 선수들의 협상력이 크게 강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구단과의 계약에서 더 유리한 조건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계약 해지 시 부담할 손해배상액도 줄어들어 이적이 수월해진다. 반면 구단의 입장에서는 선수 관리가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이적료 수입도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 급등한 이적료가 하향 안정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일각에서는 구단들이 계약금과 연봉은 높이되 계약기간을 단축하는 방향으로 선회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FIFA는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규정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개정 전까지 법적 분쟁이 늘어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FIFA가 규정을 정하면 전 세계 국가 축구협회가 따라야 하므로 한국 프로축구 구단도 동일한 내용을 적용받게 될 전망이다.

[돋보기]
 

 숨겨진 쟁점 : 유소년 육성지원금 축소 우려

이번 디아라 판결에서 ECJ가 간과한 중요한 쟁점이 있다. 바로 FIFA의 ‘연대 기여금 제도(Solidarity Mechanism)’ 문제다.

이 제도는 프로축구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2001년 도입됐다. 선수가 계약 기간 중 이적할 때 발생하는 이적료의 5%를 해당 선수를 육성한 구단들에 분배하는 제도다.

FIFA 규정(RSTP) 제21조는 프로선수가 계약 만료 전에 이적할 경우 선수 교육과 훈련에 기여한 모든 구단에 이 연대 기여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분배 기준은 해당 선수가 12세부터 23세 사이에 각 구단에서 보낸 기간에 비례한다.

영국 로펌 화이트앤케이스의 재스퍼 바우터스 변호사는 “이번 판결로 계약 해지가 쉬워지고 이적료가 줄어들면 자연히 유소년 육성 구단에 돌아가는 지원금도 감소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재정이 열악한 중소구단들이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실제로 많은 중소구단이 유소년 육성에 투자하고 이들이 프로 무대에서 성공했을 때 받는 연대 기여금을 주요 수입원으로 삼고 있다.

FIFA는 EU법을 준수하면서도 선수단 안정성과 유소년 육성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전문가들은 이적료 대신 육성지원금을 직접 부과하는 방식이나 구단의 매출액 중 일정 비율을 의무적으로 육성비용으로 할당하는 등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허란 한국경제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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