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 '몽키하우스'의 일주일, 죽음의 공포를 참기 힘들었다"

박건희(가명) 옛 성병관리소 피해자 2024. 10. 27.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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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옛 성병관리소를 말하다]

저는 두레방에서 온 박건희(예명)라고 합니다.

저를 포함한 기지촌 여성들은 당시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 땅에서 스스로 살아보려고 온갖 고생을 다 한 사람들입니다. 형제들은 많고, 제대로 학교도 나오지 못한 채 신문의 광고를 보고 "좋은데 보내준다"는 말만 믿고 기지촌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일할 수 있는 곳을 소개 시켜준 직업소개업자들이 마냥 고마웠고. 포주들에게 진 빚도 당연히 갚아야 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아니, 당장 살아야 했기에 의식주가 해결될 수 있었던 기지촌이 나의 고향이자 죽을 때 묻혀야 할 곳일거라고 숙명처럼 여겼습니다.

21살때의 참혹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어느날 밤에 동두천에서 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봉고차에서 사람들이 내리더니 검진증을 보자고 했습니다. 당시 미군 남자친구와 결혼한 저는 검진증이 없었습니다. 검진증이 없다는 말을 듣자마자 저를 차에 태웠습니다. 어린 저는 두려워서 반항도 하지 못했습니다. 차 안은 이미 많은 언니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언니들에게 어디로 가는지 묻자 '몽키 하우스'에 간다고 했습니다. 차는 계속 달려 산속으로 들어갔고 어두워서 앞을 분간하지 못했고 어딘지도 모르는채 끌려가면서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도착한 곳은 깊은 산속이었고, 2층짜리 시멘트 건물이었습니다. 끌려간 날은 우리 모두 2층으로 올라가서 잠을 잤는데, 낡고 지저분한 이불에 딱딱한 시멘트 바닥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밤을 새다시피 하고, 다음날 1층으로 내려와서 산부인과 검사를 받았는데 저는 성병에 걸리지도 않았는데도 주사를 맞았습니다. 당시에 미군과 결혼 했기에 성병에 걸릴 리가 없었습니다. 주사는 눈물날 만큼 너무너무 아팠습니다. 다리가 저리고 쥐가나서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 주사가 페니실린 주사였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너무 아파서 기절할 것처럼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는데 간호사가 눈앞에서 다른 언니에게 주사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언니는 정말 기절을 했습니다. 기절한 상태에서 입으로 계속 중얼거렸습니다. 침대 같지 않은 허름한 침대에 언니를 뉘였는데 침대 옆 쇳덩어리에 그 언니가 계속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막 박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언니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 언니의 이마는 멍이 많이 들었고 주먹으로 맞은 것처럼 크게 상처가 생겼습니다. 결국 깨어나기는 했지만 엑스레이도 찍지 않았고 그냥 방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언니들 말로는 페니실린을 맞으면 약이 독해서 임신을 못한다고 했습니다. 임신을 해도 자꾸 유산이 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저는 그 산속에서 일주일이나 있었습니다. 우리를 원숭이들처럼 가둬놓고, 자유를 빼앗고, 무서운 주사를 계속 맞았습니다. 면회도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검사하던 의사, 간호사들은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저는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장 참기 힘들었습니다.

▲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산의 옛 성병관리소 건물이 폐허로 남아 적막하다.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시의 철거 정책에 반대하며 천막 농성을 이어 가고 있다. ⓒ연합뉴스

머리가 백발이 다 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들의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게 고생만 하다가 지금 저와 언니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지금까지도 생활이 어렵고,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결국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우리 모두는 사회적인 낙인과 비난 속에서 기도 한번 못 펴고 숨죽이며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생겼습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이렇게 우리를 생각 안해주는데, 참으로 애가 타고, 서글프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122명의 원고들은 용기를 내었고. 나라가 우리를 관리하고 인권침해 하였다는 사실과, 우리가 겪었던 모든 피해들을 국가를 상대로 법에 호소하여 대법원 판결까지 받아냈습니다. 그리나 이것으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고들뿐만 아니라 지금도 많은 기지촌 여성들이 살아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갔던 동두천 몽키하우스가 아직도 소요산에 있고, 그 건물을 동두천시에서 철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건물은 국가가 우리를 억지로 가둬놓고 검사하고, 주사를 놓았다는 증거이고, 우리들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 건물이 없어지면 증거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 건물을 바라볼 때 가슴 저리게 아프지만 후대를 위해서라도 남겨져서 그곳을 보여주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흉물이 되어버린 건물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저희가 고통받고 감시받았던 피해와 기억들을 치유하고, 기지촌 역사와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저와 같은 기지촌 여성들에 대해 알릴수 있는 공간으로 바꿔야 한다고요.

다시 강조하지만 옛 성병관리소는 인권 침해와 폭력을 겪었던, 아프지만 반드시 보존해야 할 엄연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다시는 이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 후대가 기억해야 할 공간으로 남겨져야 합니다. 가난과 전쟁 때문에 50년 전의 저와 같은 소녀들, 여성들이 더 이상 희생당하거나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학생들에게 정의와 평화를 교육하는 건물로 새롭게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국가를 상대로 한 대법원판결은 소송을 제기한 원고들에게만 적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부는 기지촌 여성 '전체'의 지원을 약속해야 합니다.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특별법’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대법원의 판결은 과거 미군 범죄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 간 윤금이 뿐만 아니라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방치되었던 우리 기지촌 여성들의 문제가 개인들의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음을 증명합니다. 오래 걸릴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니들! 이모님들!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어리석고 불쌍하고 부끄럽다고 자책하지 맙시다. 정부의 책임을 묻고 지원도 당당히 받아 남은 여생만큼은 잘 살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박건희(가명) 옛 성병관리소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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