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던 새도 떨어뜨리던 권세가 몰렸던 그곳…지금은 여고 테니스장 됐다는데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10. 26.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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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호령하던 벌열가 세거지의 흥망성쇠
안국역 사거리에서 바라본 북촌 전경(1884년). 북촌은 노론 권세가의 저택 밀집지역이었다. [미국 보스턴미술관(퍼시벌 로웰 촬영)]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도 10년 못 넘기고, 3대 가는 천석꾼 부자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각역 SK종로타워(옛 화신백화점) 뒤편 골목에는 3.1운동 때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처음 낭독했던 요리집 태화관 터가 있다. 현재의 태화빌딩 자리다. 태화관의 명칭은 능성 구씨 종가 동편에 세워졌던 정자 태화정(太華亭)에서 따왔다.

오늘날 태화빌딩, 종로경찰서와 그 주변을 모두 포함하는 너른 땅(종로구 인사동, 공평동)은 조선시대 능성 구씨들이 400년 동안 세거했던 지역이다. 능성 구씨들은 왕실과 복잡한 혼맥(婚脈)을 맺으며 명문가로 발돋움했다. 세조 때 활약한 영의정 구치관(1406~1470)과 정2품 지중추부사 구치홍(1421~1507) 형제가 집안을 일으켰다. 이어 구치홍의 아들 구수영(1456~1524)이 세조의 막내 남동생 영응대군(1434~1467)의 무남독녀 길안현주(1457~1519)와 결혼하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세조실록> 1467년(세조 13) 2월 5일 기사에 의하면, 세조는 영응대군이 죽었을 때 음식을 폐했을 만큼 동생을 아꼈다. 그런 세조가 조카의 결혼을 기념해 선물로 하사한 땅이 바로 태화빌딩 일대다. 조카 사위 구수영은 철저히 권력만 좇았다. 연산군의 충복 역할을 했지만 중종반정에도 가담해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봉해졌다. 구수영의 3남 구문경은 연산군의 장녀 휘순공주, 구수영의 증손 구사안(1523~1562)은 중종의 3녀 효순공주(1522~1538)를 부인으로 맞았다.

구사안의 동생 한성판윤 구사맹(1531~1604)의 딸은 선조의 5남 정원군(원종·1580~1620)과 결혼한다. 이들 사이의 2남이 조선 16대 인조(재위 1623~1649)다. 구사안은 서쪽 땅을 동생 구사맹에게 떼어 줘 집을 지어 살게 했다. 여기서 인조가 어린시절 자랐고 외삼촌 대사성 구성(1558~1618)에게 학문을 배워 집은 ‘잠룡지(潛龍池)’로 호칭됐다. 구사맹의 손자이자 인조의 외사촌인 우의정 구인후(1578~1658)는 인조반정을 주도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봉됐다.

북촌 구씨들, 왕실과 복잡한 혼맥(婚脈) 맺으며 승승장구
능성 구씨 종가가 자리잡았던 종로 태화빌딩(우측)과 하나로빌딩. 구씨 종가터는 언덕위에 위치해 주변을 조망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배한철 기자]
태화빌딩 앞의 삼일독립선언유적지. 능성 구씨 저택에 들어선 요릿집 태화관에서 3.1운동 때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처음 낭독했다. [배한철 기자]
구윤명 초상화. 영조, 정조대에 5조 판서를 지낸 인물이다. 능성 구씨는 왕실과 중복혼을 통해 가문이 크게 현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이를 통해 구사맹의 아들 병조판서 구굉(1577~1642), 구인후의 5세손 한성판윤 구택규(1693~1754), 그의 아들 5조 판서 구윤명(1711~1797), 종1품 판의금부사 구윤옥(1720~1792), 구윤명의 아들 병조판서 구상 등 고관이 쏟아졌다.

정자(태화정)와 연못까지 갖춘 대저택의 능성 구씨 종가는 ‘북촌갑제(北村甲第·북촌에서 제일가는 집)’로 불렸다. <승정원일기> 1758년(영조 34) 3월 9일 기사에 따르면, 영조가 “그대의 집이 가장 높다는데 과연 그러한가”라고 묻자, 구윤명은 “대개 태화정의 자리는 아주 높은 곳이어서 두 궁궐과 동대문, 남대문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 남으로 만리현, 동으로는 왕십리까지 굽어볼 수 있다”고 답했다. 실제 인사동 거리에서 바라볼 때 태화빌딩은 언덕 위에 서 있다. 1773년(영조 49) 2월 영조는 왕세손(정조)을 데리고 잠룡지(구사맹 종가)와 태화정(구사안 종가)에 직접 행차하기도 했다. 골목 입구에는 방범초소인 이문(里門)까지 설치돼 위세를 떨쳤다. 청진동 이문설렁탕 상호가 여기서 유래했다.

그러나 조선말 구씨들이 권력에서 멀어지고 가세가 기울면서 구씨들은 정든 터전을 처분하고 뿔뿔이 흩어진다. 1847년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인 김흥근(1796~1870)에 이어 헌종의 후궁 경빈 김 씨(순화궁·1847~1908), 을사5적 중 한명인 이완용(1908~1913)이 차례로 소유했다가 태화관(명월관 분관·1913~1921), 미국 감리교의 여성교육기관인 태화기독교사회관(1921~1939)으로 사용됐다.

태화정 일대는 북촌(北村)에 속한다. 한양도성을 가로로 관통하는 종로의 북쪽,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공간이다. 조선시대 권력을 독식하던 서인 노론 집권세력들의 거주지였다. 여흥 민씨도 북촌의 성씨다. 민씨는 조선초 왕비를 배출하기도 했지만 정치적 존재감이 드러난 것은 17세기 이후다.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이 분열하는 정치적 격동 속에서 호조참의 민광훈(1595~1659)의 세 아들 형조참판 민시중(1625~1677), 좌의정 민정중(1628~1692), 돈녕부영사 민유중(1630~1687) 등이 우암 송시열(1607~1689)의 학문적, 정치적 입장을 따랐다. 1680년(숙종 6) 민유중은 숙종(재위 1674~1720)의 국구가 됐다. 민유중의 딸이 인현왕후(1667~1701)다. 민유중의 아들 공조판서 민진후(1659~1720), 좌의정 민진원(1664~1736), 민정중의 아들 우참찬 민진장(1649~1700), 민시중의 아들 판의금부사 민진주(1646~1700)도 노론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민씨들, 숙종비 인현왕후 이후 노론핵심 집안으로 부상
숙종은 인현왕후와 결혼하면서 안국동에 집을 마련해 처가에 선물했고 장인 민유중은 이 집에서 기거했다. 덕성여고 테니스장에 해당한다. 폐비가 된 인현왕후도 대궐에서 쫓겨난후 안국동 집에서 거처했다. 영조는 1761년(영조 37) 집을 방문해 감고당(感古堂) 편액을 내렸다.

고종초 청송 심씨 우참찬 심이택(1832~?)이 감고당을 샀다. <고종실록> 1864년(고종 1) 3월 5일 기사는 “심이택이 인현왕후의 감고당을 멋대로 뜯어고쳐 하인배들의 방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흥선대원군은 집을 빼앗아 자신의 처남인 민승호에게 넘겼다. 8살에 아버지 민치록을 여의고 서울로 올라온 명성황후(1851~1895)도 1866년 고종 비로 간택되기 전까지 감고당에 머물렀다.

서촌(西村)의 대표 벌열가는 안동 김씨다. 이들을 경북 안동과 구분해 신안동 김씨라고 했고 지명이 장동(壯洞)이어서 장동 김씨라고도 했다. 장동지역은 청풍계(淸風溪)로 호칭됐다. ‘영원히 변치 않는 맑고 높은 절개’를 뜻하는 백세청풍(百世淸風)에서 유래한다. 청풍계는 청운초교에서 창의문(자하문)에 이르는 인왕산 기슭의 한적한 지역이다. 장동 김씨 가문은 임진왜란 이후 250년간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정승 15명, 판서 35명, 왕비 3명을 배출했다. 서인의 영수이자 장동 김 씨의 적장자인 김상용(1561~1637)은 청풍계의 요지인 청운동 52-8(청운초교 북편 주택가)에 대저택을 짓고 청풍지각(靑楓池閣)이라고 했다. 백세청풍 각자는 조금 위의 청운동 52-111에 남아있다.

장동 가문을 크게 일으킨 사람은 김상용의 아우 김상헌(1570~1652)이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파를 이끌었고 인조 항복 이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서도 당당하게 처신했다. 청나라 황제는 그의 기개를 높게 평가해 죽이지 않고 오히려 칭찬해주며 아량을 베풀었다. 이 사건으로 김상헌이라는 이름과 장동 가문이 크게 빛나기 시작했다. 김상헌의 집터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장소로 알려진 청와대 옆 무궁화동산(궁정동 17-3)이다.

안동 김씨들, 한적한 청풍계 살았지만 세도정치 시작하며 북촌으로 이주
장동 김씨 세거지인 청풍계(종로 청운동)에 새겨진 ‘백세청풍’ 각자.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이 새겼다. 청운동 주택가 담벼락 아래에 놓여져 있다. [배한철 기자]
안동 김씨는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불편한 산속을 박차고 나와 도성한복판으로 이주한다. 영의정 김창집(1648~1722)의 현손 김조순(1765~1832)은 장동에 거주했지만 효명세자(1809~1830)의 국구가 되면서 교동(校洞·종로 교동초교)으로 이사했다. 김조순의 3남 김좌근(1797~1869)의 집은 인사동 경인미술관(관훈동 30-1) 일원이었지만 훗날 박영효(1861~1939) 소유로 넘어간다. 대사간 김창협(1651~1708)의 5세손 김문근(1801~1863)이 철종의 국구가 되자 그의 조카들인 김병학(1821~1879), 김병국(1825~1905)이 권력을 쥐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전동(典洞·종로 공평동, 견지동)에 살았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청풍계는 일제강점기 군수 대재벌 미쓰비시(三菱)가 사들였고 미쓰비시는 직원숙소를 짓기 위해 청풍계의 자랑인 울창한 소나무숲과 늠름한 바위를 파괴했다.

서촌의 필운대(弼雲臺)는 조선 개국공신 권근의 현손인 삼정승 권철(1503~1578)의 집터다. 오늘날 배화여고 자리이다. 권철의 아들은 임진왜란 최고의 명장 권율(1537~1599)이다. 백사 이항복(1556~1618)은 권율의 무남독녀와 결혼해 서촌 집을 물려받았다. 이항복은 집 이름을 필운이라 붙이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집 뒷마당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절벽에 필운대라고 새겼다. 필운대 각자가 배화여고 뒤편에 아직도 뚜렷이 남아있다. 필운대 주변에는 화초 재배단지가 즐비해 봄이면 성안 사람들이 꽃구경을 하러 몰려들었다. 김매순(1776~1840)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는 한양의 3대 꽃놀이 장소로 인왕산 세심대(洗心臺·국립농학교 뒤편 언덕), 남산 잠두봉과 함께 인왕산 필운대를 꼽았다.

서촌의 필운대. 필운대에는 백사 이항복의 집이 있었다. 배화여고 뒤편 담벼락에 필운대 각자가 새겨져있다. [배한철 기자]
동부(東部)의 최고 가문은 단연 관동(館洞)의 연안 이씨다. 조선 초기부터 동부에 거주했던 연안 이씨는 조선중기 대문장가 월사 이정구(1564~1635)가 등장하며 ‘관동파’를 형성했다. 연안 이씨는 조선개국에 적극 참여하면서 국초 함경도 안변에서 서울로 이주해 왔다. 그러다가 세조대 대사헌과 한성판윤을 지낸 이석형(1415~1477)이 동부 연화방에 계일정(戒溢亭)을 짓고 살면서 동부와 인연을 맺었다. 계일정 터는 효제초교 북쪽의 연지동 일원으로 추측한다.

이석형의 현손이 연안 이씨 관동파의 파조 월사 이정구다. 이정구는 1590년(선조 23) 과거에 급제해 대제학, 예조판서,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이정구는 탁월한 문장력과 중국어 실력으로 임진왜란의 국난극복과 이후 명청 교체의 국제질서변동 과정에서 대명·대청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했고 대내적으로는 문필가로서 최고의 명망을 이룩했다. 이를 토대로 이정구의 후손들은 연안 이씨 관동파를 형성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연안 이씨 관동파는 상신(相臣·삼정승) 8명과 대제학 6명, 청백리 1명 등 인재를 쏟아냈다. <증보문헌비고> ‘씨족고’에 수록된 조선후기 연안 이씨 문벌인물 36명 중 이정구 직계가 28명(77%)이나 된다. 특히 최초의 ‘3대 대제학 가문’이자 ‘부자 대제학 가문’으로 널리 회자됐다. 이정구 본인과 아들 이명한(1595~1645), 손자 이일상(1612~1666)이 대제학에 올랐고, 이정구의 6세손 이복원(1719~1792)은 아들 이만수와 함께 대제학을 했다. 대제학은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라는 의미의 ‘문형(文衡)’으로 별칭되며 막강한 학문적 권위가 부여됐다.

대문장가 이정구 고택은 서울치대···정승 12명 배출한 동래 정씨 가옥 우리은행 본점
상류층 가옥(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이정구 고택은 관동에 있었다. 관동은 고조부 이석형 연화방 가옥보다 북쪽이다. 관동은 18세기 중반 제작된 <도성도>에는 종묘 동편에 표시돼 있지만 19세기 중반의 <수선총도(首善總圖)>는 혜화역 부근으로 나타난다. 정조가 서울대 의대 자리에 사도세자 사당인 경모궁을 건립하면서 행정구역도 위쪽으로 변경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1600년 전후 지어졌을 이정구의 관동고택은 종묘 동쪽의 서울대 치대 언저리에 위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회현동 동래 정씨 고택 옆 은행나무. 남촌의 명문가는 12명의 정승을 배출한 동래 정씨다. 우리은행 본점이 동래 정씨 고택 자리다. 수령 500년 이상의 은행나무 2그루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배한철 기자]
남촌의 명문가는 ‘동래 정씨’다. 동래 정씨들은 회현동(우리은행 본점)에 터 잡았다. 중종 때 삼정승 정광필(1462~1538) 집안에서 좌의정 정유길(1515~1588), 좌의정 정창연(1552~1636), 삼정승 정태화(1602~1673), 좌의정 정치화(1609~1677), 좌의정 정지화(1613~1688), 우의정 정재숭(1632~1692), 좌의정 정석오(1691~1748), 우의정 정홍순(1720~1784), 영의정 정존겸(1722~1794), 영의정 정원용(1783~1873), 좌의정 정범조(1833~1898) 등 무려 12명의 정승을 배출했다. 회현동(會賢洞)이라는 지명도 ‘동래 정씨 현자들이 모여사는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 세상 사람들은 회현동의 동래 정 씨들을 특별히 ‘회동 정씨’라고 했다. 우리은행 뒤뜰과 서편 도로 중앙에 수령 500년 이상의 은행나무 2그루가 심겨져 있다.

서울의 문벌들은 벼슬을 독차지했지만 그들의 대저택은 후손이 몰락하며 처분되거나 개발돼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반면, 중앙정계에서 소외된 향촌 사대부들은 오히려 오늘날까지도 종가를 보존한 가문이 허다하니 세상사 모를 일이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열양세시기(김매순)

2. 종로 시전 뒷길의 능성구씨들. 배우성. 서울학연구 제67호. 서울시립대 부설 서울학연구소. 2017

3. 조선 후기 한양 동부 관동의 인문지리와 연안이씨 관동파. 오세현. 서울학연구 제61호. 서울시립대 부설 서울학연구소. 2015

4. 전동 큰 길 주변의 근대와 조선 벌열가문의 후예들. 배우성. 서울과 역사 제101호. 서울역사편찬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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