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싸우면 다행이라고요? 그럼 친구 아니죠”…‘톰과 제리’ 같은 전희철과 김병철의 우정 이야기[유재영의 전국깐부자랑]

유재영 기자 2024. 10. 2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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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농구 레전드 ‘피터팬’ 김병철-‘에어본’ 전희철

깐부.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은어, 속어죠. 제아무리 모든 것을 갖춘 인생도 건전한 교감을 나누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

초등학교 동창으로 시작해 대학, 그리고 프로에서 둘도 없는 우정을 쌓은 한국 남자 농구 대표 ‘오빠부대’ 스타 김병철(왼쪽)과 전희철. 동아 DB

● 친구 ‘전희철’에게 꼭 확인하고 싶었던 것

“초등학교 졸업하고 왜 삼선중학교로 갔었어?”
“용산중학교로 가면 못 뛸까봐. 내가 결정했겠냐?”

나이로 ‘5학년 1반’이 된 두 초등학교 동창은 만나자마자 38년 전을 회상하며 티격태격했다. 둘은 서울 대방초등학교에서 농구를 같이 했다. 잘했다. 농구인들이 ‘될 성 부른 나무다. 떡잎부터 다르다’며 주목했다. 졸업을 하고 둘은 서로 다른 농구 명문 중학교로 진학을 했다. 단짝 친구가 갈라졌다.

1990년대 농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 여학생들의 우상이었던 ‘오빠부대’ 스타 김병철(51 ּ 전 오리온 코치)과 전희철(51 ּ SK 감독)은 농구 인생을 같이 펼친 초등학교 동창, 둘도 없는 친구다. 전희철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대방초로 전학을 와서 인연이 됐다. 개구리도 같이 잡으러 다니던 사이. 찰떡 짝궁으로 지내다 김병철은 용산중으로 갔고, 전희철은 삼선중으로 갔다.

중학교에서 다른 친구들을 만나면 대부분 초등학교 친구들을 잊는데, 어린 김병철은 그렇지 않았다. ‘쿵짝’이 맞는 전희철과 평생 같은 학교, 같은 팀에서 농구할 줄 알았다. 그래서 궁금했다. ‘왜 희철이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다른 중학교를 갔는지.’ 하지만 묻지 못했다. 때를 놓친 탓도 있지만 행여 희철이가 ‘다른 친구랑 같이 농구하려고’라고 말할까 두려웠다. 그 궁금증을 중년이 돼서 풀었다.

‘초등학교 때는 얼추 어깨 높이가 비슷했는데’ . 12살에 만나 51살. 40년 지기인 두 사람의 어깨 동무는 여전히 자연스럽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삼선중 선생님이 아버지를 찾아 오셨어. 늦어도 2학년 때는 경기를 뛸 수 있다고 하셨지.”(전희철)
“그랬구나. 나는 용산중으로 왜 갔는지 기억이 안나. 하하. (박)재헌이하고 나만 용산중 갔던 것 같애.”(김병철)
“아니야. 휘문중 갔던 (석)주일이하고 나만 빼고 동기들 거의 용산중으로 갔잖아.”(전희철)
“용산고 동기들이 거의 그만뒀었어.”(김병철)

아버지가 진학을 결정했다고 하니 김병철의 마음이 풀린다. 당시만 해도 주로 고학년 선수들 위주로 경기 내보낼 때다. 친구 아버님의 마음과 상황이 이해가 간다. 전희철은 김병철이 이렇게까지 자신과 중학교를 함께 가고 싶어했는지 몰랐다.

● 1992년이 없었다면

1991년 7월 19일 한 유력 일간지 스포츠면에 실린 기사가 화제가 됐다. ‘메가톤급 유망주 가드로 각광받는 김병철이 주위의 예상을 깨고 고려대 진학을 결심한 건 약 한 달 전 고교 제1의 센터 전희철이 고려대 입학동의서에 도장을 찍은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91년은 둘이 고교 3학년 때다. 김병철은 용산중을 거쳐 용산고에서 날아 다녔다. 1학년 때부터 주전이었다. 돌파는 거침없이 빨랐고, 거침없이 솟아올라 던지는 슛 성공률이 무척 높았다. 가드로 소화할 줄 아는 공격 옵션이 한 둘이 아니었다. 치고 빠지면서 농구를 하는 게 거칠지 않고 막힘없이 부드러웠다. 몇몇 언론에서는 ‘제 2의 허재’라고 수식어를 붙이기도 했다.

전희철도 경복고에 들어가자마자 에이스였다. ‘한 차원 다른, 걸출한 센터가 나왔다’며 농구계가 떠들썩했다. 키가 2m 가까이 되는 데 움직임이 날렵했다. 점프는 탄력을 주체하지 못해 림 한참 위로 손이 올라갔다. 곹밑 장악은 두말할 것 없고, 외곽에서 골밑을 향해 드리블과 스텝으로 파고 들어가는 움직임이나 3점 슛 라인 안팎에 던지는 슛 감, 터치는 이전 선배 센터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다. 시원하게 스텝으로 돌아 수비를 따돌리고 던지는 턴 어라운드 중거리슛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전매특허. 한국 농구 역사에서 한 차원 진화된 센터 시대를 연 장본인이라 해도 과언 아니다.

당시는 대학 농구가 농구대잔치를 통해 화려한 조명을 받던 시절이다. 고교 졸업반인 둘을 성인 대표팀에 선발해 세대 교체를 해야한다는 얘기까지 나오던 때다. 당연히 둘을 잡기 위해 대학들이 전쟁을 벌였다.

“사실 연세대를 가고 싶었거든. 겉으로만 보고. 경복고하고 고려대하고 연습경기를 자주 했는데 그 때는 고려대를 이기기도 했어. 그러면 고려대 선배들이 벌로 안암동 운동부 숙소까지 뛰어가는 거야. 그걸 보고 겁이 나더라고.”(전희철)

“나는 솔직히 어느 대학으로 가는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어. 훈련이 너무 힘들고 고되서 어린 마음에 용산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밖에 안했어. 그런데 지금 용산에 살고 있네. 하하.”(김병철)

“그 시절에는 중앙대가 스카웃 전쟁에서는 늘 빨랐어.”(전희철)

“맞아. 가장 먼저 중앙대에서 제의가 왔었어. 원래 가드 포지션에서 잘 하는 선수들은 중앙대에서 가장 빨리 접촉을 했을 때니까.”(김병철)

둘은 고려대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다. 라이벌 연세대 전에서 활약 모습. 왼쪽에서 네번째, 고려대 13번이 전희철. 오른쪽 뒷줄 10번이 김병철. 동아 DB
고려대 92학번, 다시 동기로 만난 전희철이 김병철은 신기했다. 6년이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친구는 달라져 있었다. 우선 훌쩍 커 있었다. 코트에서 상대로 만나 뛸 때는 몰랐었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신이 봐도 멋있고 본받을만한 선수, 친구가 돼 있었다. 전희철을 따라 같은 대학에 오길 잘했다. 자연스럽게 동기로 또 만나서 성인으로 진입하는 인생 단계에서 의지가 됐다. 그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키가 168cm 정도 됐었고, 병철이 너하고 크게 차이는 안 났어. 그런데 졸업식 하기 전에 겨울방학 때 삼선중에서 운동을 하고 석달 만인가, 10cm 넘게 큰 거야. 180cm 가까이 됐지.”

“나는 초등학교 때 키가 153cm였거든. 고등학교 가니까 희철이 너가 너무 커보이는 거야. 대학 들어갈 때는 더 커 보이더라고. 197cm였잖아.”

“하하. 인마, 고3 때 신문 보면 내 키가 198cm라고 나와 있을 거야. 왜 그런 줄 알아? 그 전까지 웬만한 선배 센터들이 대부분 197cm였어. 정말 웃기다. 198cm가 없는 거야. 1cm 올린 거지.”

1992년은 서로에게 여러 모로 값진 해로 기억된다. 특히 김병철은 그해 전희철에게 술도 배웠다. 나이 50 인생에서 아주 큰 사건이다. 소위 맥주와 양주를 섞는 ‘폭탄주’도 전희철 때문에 알고 마셨다. 전희철 손에 이끌려 강남 압구정동도 가봤다. 선배들 눈치도 보고, 훈련도 고교 때보다는 배로 힘든 대학 신입생 시절, 마음 뒤숭숭할 때마다 전희철에 의지해 마음을 잡았다.

“기억 나? 입학식 하기 전에 동계 훈련을 괌으로 갔던 거? 둘이 빨래 담당이었잖아. 훈련 일주일 지났는데 밤늦게 리조트 앞 빨래방 가서 한 보따리 빨래 넣어놓고 둘이 보도블럭에 앉아서 별보고 그랬지. 다들 자는 시간에. 너무 힘든 전지훈련이었어. 하루하루 시간이 너무 안 가는 거야. 집에 가고 싶었는데 너 때문에 견뎠어.”(김병철)

“진짜 별 보고 둘이 막 엉엉 울고 그랬다. 하하. 야, 괌 도착하자마자 여권 다 걷으라고 했잖아. 난 잊어버릴 줄 알고 여권을 걷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더라고. 도착하자마자 새벽에 트랙 훈련하고….”(전희철)

“용산에서 어렵게 벗어났는데 고려대로 들어왔어. 하하.”(김병철)

“밥도 직접 해서 먹어야 했잖아. 40일 가까이 그렇게 있으니까 눈물이 매일 나더라고. 엄마가 정말 보고 싶었어.”

● 우리만의 투맨 게임

그래도 둘이 위로하고 토닥이며, 또 추억을 쌓으며 새내기 시절을 잘 버틴 덕에 정말 선수로 대학 4년을 찬란하게 보냈다. 이전에도 고려대 농구팀은 잘 나갔지만 둘이 선봉장을 섰던 1992~1995년은 정점을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이벌 연세대와 벌인 명승부는 그냥 엮어도 드라마다. 후배 양희승, 신기성, 현주엽이 차례로 합류하면서 문경은-이상민-우지원-서장훈-김훈의 연세대와 성사된 매치업은 지금까지도 농구팬들에게는 판타지이고 만화다.

이런 구도에서 농구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선수로서는 천운이다. 게다가 당시 ‘농구 대통령’ 허재가 이끌던 기아, 전통의 강호인 삼성 현대 등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과 수없이 맞붙으면서 둘은 한국 농구의 전설로 남는 발판을 다졌다.

“희철이, 전 감독이 내 농구 인생 중요한 순간에 옆에 있지 않았다면 아마 선수 생활하기 벅차지 않았을까 싶어요. 매일 붙어다니면서 많이 싸우고, 보면 으르렁거리기도 했지만 늘 전 감독이 화해 제스처를 먼저 해주고, 아무 일 없는 듯 챙겨주고 했죠. 제가 많이 의지해서 그랬을 거예요. 농구할 때도 도움을 많이 받았고요. ‘김병철’에게 안정감을 주는 변하지 않는 기둥이라고 할까요.”

“병철아, 정말 대학 때는 맨날 미친 듯이 싸웠다. 하하.”

“뭘로 싸웠는지 기억도 안 나요. 서로 살살 긁으면 옆에 있는 것 집어 던지고 싸우다 다음날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또 친하게 밥 먹으러 가고 그랬죠.”

- 싸우는 게 우정의 루틴 같다.

“금요일 싸우고 토요일 쉬는 날, 하루 얘기 안할 때 쯤 희철이가 ‘어디 나가자’, ‘맥주 한 잔 시원하게 하자’ , 이러고 살짝 말을 걸어요. 그러면 생맥주 1000cc 시원하게 마시고 안암동 목욕탕에서 샤워하고 들어와요. 숙소 밖에서 팬들이 진을 치고 있을 때 유일한 낙이었죠.”

“맥주도 자주 마셨지만 싸우고 나서 용산 밖에 모르는 김병철의 서울 나들이를 제가 다 시켜줬다니까요. 이 동네는 어떻고, 저 동네는 이렇고… 개인 서울 가이드였어요. 하하. 그러니까 나중에는 싸우고 난 다음에 지가 ‘오늘은 어디 살갈 데 없냐’라고 물어봐요.”

대학 특급 가드와 센터의 졸업식. 팬들과 취재진들이 몰려 아수라장이었다. 왼쪽 두 번째가 김병철, 오른쪽이 전희철. 동아 DB
코트에서도 서로가 밀고 끌어주면서 둘은 대학 3~4학년 때 자기 포지션에서 물오른 기량을 과시했다. 출중해진 1대1 개인 능력으로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다분히 서로의 장기를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살려주는 둘만의 ‘투맨 게임’ 패턴이 있었다. ‘투맨 게임’은 상대 수비 둘을 놓고 하는 2대2 플레이다.

공을 가질 때 김병철은 전희철이 내외곽에서 움직임으로 수비와 순간 간격을 벌릴 때를 맞춰 템포 빠르게 패스를 보낸다. 전희철은 바로 본인의 득점으로 해결하기도 하고, 슛 모션과 컷 움직으로 김병철 전담 수비까지 자신에게 끌어 놓고 김병철에게 오픈 슛 기회를 만들어 준다. 둘만의 시그니처 패턴이다.

전희철이 수비를 등지고 공을 잡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김병철이 기습적으로 골밑 ‘백 도어 컷’을 하고 전희철이 바로 패스를 넣어 득점을 올리는 패턴도 많았다. 여기서 몇 가지를 더 쓰고 했는데 피가 되고 살이 돼 지도자를 하면서도 요긴하게 활용했다.

“더 잘 할 수 있었죠. 대학 때 (신)기성이가 현주엽하고만 투맨 게임을 하려고 했어. 전 감독은 내가 공을 줘야 나하고 뭔가 이것 저것 나오는데 기성이가 주엽이한테로만 가니까….”

“동감입니다. 이것들이.”

● 김병철을 위한 전희철의 기발한 열쇠 제작

설마했다. 둘은 대학을 졸업하면 또 갈라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대학 최고의 슈팅가드와 포워드 겸 센터를 실업 라이벌 삼성과 현대가 가만둘리 없었다. 이전 스카우트 관행상 같은 대학의 스타급 선수들을 한 팀으로 몰아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학 3학년 때부터 김병철은 삼성, 전희철은 현대로 간다 등등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1995년 말부터 프로농구 출범 얘기가 나오더니, 이듬해 본격적으로 추진이 되면서 신생팀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당시 동양(현 소노)에게 고려대 졸업생 우선 지명권이 주어지면서 1996년 2월 졸업예정자였던 김병철과 전희철은 또 한 팀에서 뛰게 됐다.


둘은 2001~2002시즌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에서 동양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생애 최고의 기쁜 날 중 하나. 동아 DB.
동양에서 프로 선수로 평생 못 잊을 영화 같은 추억을 쌓고 2001~2002시즌에는 챔피언결정전 우승컵을 함께 들어올리는 감격까지 누렸다. 동양의 초창기 시절, 빡빡한 스케줄 중에 훈련이 끝나고 밤에 선수단 숙소를 감독과 코치 몰래 빠져 나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배꼽을 잡는다.

“숙소가 5층 짜리 빌라인인데 방에서 몰래 나와 옥상 발코니로 가서 계단 타고 내려와 나갔잖아. 기억나지?”(김병철)

“나. 옥상에서 한 번 미끄러졌잖아. 갈 뻔 했어. 하하.”(전희철)

“맞아, 끝 부분에 빗물 받이가 있었지.”(김병철)

“미끄러졌는데 거기에 딱 중심이 걸렸어. 그런데 나중에는 감독님이 어떻게 나가는 줄 알고 옥상 문을 자물쇠로 잠궈버렸더라고.”(전희철)

“그러게.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나갈 수가 없어졌잖아. 그런데 우리 또 어떻게 나갔지?”(김병철)

“인마, 내가 열쇠 수리공 불러서 자물쇠 걸어둔 걸 따버렸잖아(전부 폭소). 자물쇠를 부시면 감독님이 알아차릴 것 같고, 난리가 났겠지. 주말에 수리공 아저씨를 불렀는데 돈을 더 주고 따달라고 했어. 그러더니 열은 거야. 그래서 열쇠를 맞출 수 있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해서 열쇠까지 맞췄지. 하하. 평상복을 입고 올라가다 걸리면 안 되니까 가방에다 옷을 넣어두고 1층 밖에 길가에 던져 놓고 나가기도 했다. 하하.”(전희철)

“정말 대단했어. 희철이가 보면 참 기발해요. 나중에는 외국인 선수 애들도 몇 번 그렇게 외출한 걸 감독님이 알고, 국내 선수 한 명을 외국인 선수들 두 명 자는 사이에서 자게 했잖아. 지키라고. 하하.”(김병철)

보통 편한 사이가 아니면 이런 포즈가 안 나온다. 동양에서 우승을 하고 동아일보 인터뷰에 응한 김병철과 전희철. 동아 DB

● 병철이하고는 여기까지라고 생각했죠

“듣자마자 ‘무슨 소리야’고 했죠. 일산에 있다길래 바로 갔어요.”

우승 직후 난데없는 비보가 김병철에게 날아왔다. 전희철의 전화였다. 팀을 떠난다고 했다. 프로농구는 팀별로 샐러리캡이 있다. 선수 연봉 총합이 규정으로 정한 일정 액수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 당시 둘은 고액 연봉자들이었다. 팀 사정상 김병철은 잡고, 전희철은 놓을 수 밖에 없던 것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 있다.

“장난하지 말라고, 뻥치지 말라고 했죠.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 초등학교, 대학, 그리고 프로에서 한솥밥을 먹은 친구가 하루 아침에 다른 팀으로 간다는데 기분 묘하더라고요. ”

- 말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겠다.

“일산에서 둘이 술만 마셨죠. 희철이가 취할 듯 해서 용인의 우리 집으로 데려가서 한 잔 더 했어요.”(김병철)

“PC방에서 놀다가 또 병철이 집에가서 시간을 보냈지. 그 때는 ‘병철이하고 여기까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전희철)

“새벽까지 우리 집에 있다가 아침에 해장국 같이 먹고 너 집에까지 데려다줬잖아. 너 보내고 나니까 정말 허전하더라고. 나중에 맨날 동양의 빨간 유니폼 입던 희철이가 청색 KCC 유니폼 입고 나오는데 그것도 어색했어.”(김병철)

전희철은 KCC로 이적해 SK를 거쳐 2008년 은퇴를 했다. 그리고는 바로 SK 전력분석원, 운영팀장, 2군 코치, 수석코치를 13년여 간 했다. 기다림 끝에 낙이 온다고 2021년 SK 지휘봉을 잡고 바로 2021~2022 시즌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다음 시즌에도 준우승을 했다. 은퇴하고 지도자로 살아남아야 했기에 ‘김병철’이라는 친구가 늘 머리 속에 있었지만 연락하고, 볼 겨를이 없었다.

김병철은 2011년까지 동양에서 뛰고 2022년까지 코치, 수석코치, 감독대행을 했다. 원클럽맨으로 역시 바쁘게 살았다. 감독대행을 마지막으로 지금은 코트 밖에서 감독으로 바쁜 전희철을 지켜보고 있다. 절친이기에 편하게 연락할 수도 있지만 마음으로 대화를 하고 응원했다.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드니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한 명이 잘 되고, 한 명이 너무 안돼 완전히 연락 끊어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동안 우리 오래 못 보긴 했다. 나이가 드니 싸우고 또 싸웠던 그 때가 그립더라. 정말 제대로 친구지.”(전희철)

“희철이하고는 정말 인연인 것 같아. 오랫만에 만나도 어색한 것도 없고, 내가 희철이만 만나면 어린 시절도 돌아가거든.” (김병철)

● 이제 농구로 싸워볼까

추억으로 먹고 살아도 될만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만나면 밥 먹고, 차 마시고, 옛날 얘기 하고, 그러다 니 탓, 내 탓하고 웃고 싸우고 그 자체만으로 좋았다. 대신 농구와 일 얘기는 안 한다. 서로 각자의 위치에서 잘 하고 있으니 평가를 하거나 조언하는 일도 없다.

김병철은 “감독으로 워낙 잘하고 있어서 연락하고 싶어도 참는다. 전희철은 TV로, 영상으로 봐도 똑같은 전희철이다. 나는 늘 희철이와 대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희철은 명예욕 없고, 인맥 줄 타는 것 싫어하는 김병철이 농구 욕심은 냈으면 한다. 친구와 농구로 논쟁도 해보면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제가 술도 가르쳐주고 서울 구경도 가르쳐줬으니 농구는 병철이가 한 수 보여줄 것 같아요.”(전희철)

김병철은 이번 시즌을 앞두고 “뻔한 속공 농구로 펀(FUN)한 농구를 할 것”이라고 밝힌 전희철 감독의 철학과 농구 스타일이 좋아 보인다. 오래 전 둘이 한 팀으로 뛰던 현역 시절의 농구였기 때문이다. 잡으면 뛰고, 쉽게 골을 넣고, 팬들이 보기에 시원한 농구다.

돈으로 바꿀 수 없는 둘만의 추억은 많으니, 둘이 농구로 한 번 붙어도 될 듯 하다. 때마침 프로농구 2024~2025시즌도 19일 개막했다. 전희철의 SK는 개막 2연승을 했다.

- 김병철이 보는 SK는 어떻나.

“원래 친구라도 감독의 플랜과 전략을 논하거나 건드리지는 않는데요. 희철이나 저나 코치 생활도 10년 넘게 했잖아요. 다 아니까. 다만 자밀 워니가 하이 포스트에서 공을 잡고 있을 때 다른 선수들이 공간을 충분히 넓혀주는 농구를 더 해줬으면 해요.”


나는 네가 변하지 않아 좋다. 그대로여서 좋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 안다. 그게 우리다. 옛날 벽돌 담벼락 앞에 서 있으니 고려대 시절 둘 같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두 사람이 진짜 농구로 싸워보면서 새롭게 알아가는 우정이 프로농구를 보는 또 하나의 묘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터뷰를 끝내고 먼저 떠난 김병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전희철. 항상 시즌 직전이면 저녁 식사 자리도 쿨하게 빨리 마치는 스타일인데 발길이 안 떨어지나보다.

“오늘따라 아쉽네요. 밥만 먹었네. 대학 때처럼 생맥주 두 잔 더 사주고 보낼 걸 그랬어요.”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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