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우는 왜 '햄릿'이라는 십자가를 자청했나
연출가 신유청이 셰익스피어 비극 ‘햄릿’을 무대에 올린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뜬금 없지만 축구 대표팀 감독이란 자리를 떠올렸다.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달픈 일 중 하나일 것이다. 다들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니 어느 한 사람 입 대지 않는 이가 없다. 잘 해야 본전, 삐끗하기라도 하면 역적 되기 십상이다. 공 차 보기도 전에 이런 저런 말들에 베이고, 경기가 끝나도 두고두고 이리저리 헐뜯음을 당한다.
연극 연출가가 ‘햄릿’을 맡는다는 건 그런 느낌 아닐까. 이 이야기, 남녀노소 다들 잘 안다고 생각한다. 세계 최고의 연출가와 배우들이 화려하게 재해석하며 이 무대를 만들어왔다. 셰익스피어의 가장 긴 희곡이며 가장 강력한 비극. 숭고한 시편과 풍성한 심리 묘사, 방대한 장광설 같은 독백과 이종격투기를 방불케 하는 언어의 혈투. 언젠가 한 번은 꼭 해보고 싶지만, 여간 새롭지 않고선 좋은 소리 듣기 힘들 게 뻔하다.
연출가 신유청의 이름은 어느새 공연계에 드문 ‘보증수표’다. 레바논 내전의 참상을 그리스 비극적 가족사에 비춘 ‘그을린 사랑’, 시간대를 종횡무진하며 입센을 확장한 ‘와이프’, 세기말 미국의 혼돈을 21세기 서울로 옮겨온 ‘엔젤스 인 아메리카’…. 중·대극장에 연극을 올리면서 작품의 흥행과 내용적 성취를 동시에 기대할 수 있는, 관객과 평단이 모두 차기작을 기다리는 연출가는 귀하다.
그런 신유청이 난생 처음 셰익스피어를, 그것도 ‘햄릿’을 무대에 올린다니. 햄릿을 연기할 배우가 조승우라는데 고개를 끄덕인 뒤에도 질문은 남는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십자가를 자청한 걸까.
◇주목 포인트① 조승우라는 ‘보물’
연극 무대 위의 조승우를 상상하는 것은, 오래된 비유를 빌리자면 ‘밭에 숨겨진 보물’을 떠올리는 것과 같았다. 뮤지컬 무대에서 조승우는 이미 충분히 스스로를 증명해왔다. 그렇다면 연극에서는? 연극 ‘햄릿’의 티켓 오픈과 함께 1000석 규모의 CJ토월극장 전석 전 회차를 매진시킨 힘은 조승우라는 ‘보물’이 어떤 색깔로 빛날 것인가 상상하는 관객들의 기대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뮤지컬에서도 조승우는 연기의 힘이 요구되는 배역이 어울렸다. 올해 한국뮤지컬어워즈 남우주연상을 받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유령’ 역할도 그랬다. 그동안 국내외 많은 버전으로 이 작품을 봤지만, 배우 조승우가 유령 역할을 맡은 무대를 본 뒤에야 이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무대 위의 뮤지컬 무대 위 배우에게 노래가 가진 한계를 뛰어넘는 어떤 경지 같은 것이 있다면, 조승우는 그런 경지에 가장 가까운 배우다. 이 뮤지컬의 클라이막스는 마지막 극중 오페라 ‘돈 환의 승리’. ‘유령’ 조승우가 ‘사랑한다 내게 말해줘요, 나를 홀로 두지 말아요…’ 노래할 때면, 얼굴을 후드로 덮어 표정을 가린 몸에서 애절함의 아우라가 공기를 밀어내며 뿜어져 나왔다. 무대 위의 조승우는 그저 조승우인 것만으로 충분하다. 연극 무대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영화 ‘타짜’의 최동훈 감독은 “나에게 조승우는 브래드 피트, 알 파치노였다. 그가 시나리오를 보고 영화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짝사랑하던 여자랑 데이트를 하게 된 기분이었다”고 했다.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은 “뮤지컬로 무대에 오르더라도 일 년에 한 편씩은 영화를 해줬으면 한다. 보물 아닌가. 그 연기는 영상자료원에 남겨야 한다”고 했다.
‘햄릿’은 어쩌면 모든 남자 배우의 커리어에서 셰익스피어라는 연극의 왕관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자신만의 색깔로 빛나는 보석. 배우 조승우가 기꺼이 그 역할을 자임했다. 이 보석은 어떤 빛깔로 빛날 것인가.
◇주목 포인트② 무대 명장 이태섭의 ‘지혜’
이번 ‘햄릿’의 무대는 2021년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인 이태섭 무대미술가가 맡았다. 이 또한 의외였다. 그는 이미 지난 9월 초 종연한 또 다른 ‘햄릿’의 무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무대미술가 이태섭의 명징한 무대는 시(詩)처럼 아름다운 극작가 배삼식의 텍스트를 감싸안았다. 3면이 반투명 격벽으로 둘러싸인 무대는 때로 거울처럼 관객을 향해 말하는 인물들의 뒷모습을 비췄다. 조명을 절묘하게 활용할 때, 이 격벽 속 공간은 음모가 스멀대는 구중궁궐의 복도나 죽은 자들의 유령이 지나다니는 생과 사의 흐릿한 경계가 됐다.
신유청 연출은 “무대를 디자인해주신 이태섭 선생을 무척 여러 번 만났는데, 정말 지혜로우셨다. 나조차 분명히 잡히지 않는 그림을 갖고 말씀드리면 거기 귀기울이신 뒤, 만날 때 마다 종이로 여러 가지 미니어처를 새로 만들어오셨다”고 했다.
이태섭은 1990년 국립극장 연극으로 데뷔한 뒤 30년 동안 연극·무용·오페라 등 200여 편의 무대 미술을 책임졌다. 이미 수많은 연출가들과 호흡을 맞춰 본 경험이 풍부하다. 연출가 속의 생각을 끌어내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데 그보다 더 능숙한 사람은 드물다. 그는 신유청과 10번 이상 만나 끈기있게 대화하며 모호하고 두루뭉술하게 안개 속에 있던 것 같던 무대의 그림이 분명해지도록 이끌었다. 이태섭이 만드는 이번 ‘햄릿’의 무대는 또 어떤 놀라움을 보여줄 것인가.
◇주목 포인트③ 연출가 신유청이 찾은 ‘햄릿’
‘햄릿’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세상은 더 선명하고 더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할 것이다. 신유청 연출은 어떤 ‘햄릿’을 찾아냈을까. 그가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극중 숙부 클로디어스와 어머니 거트루드가 햄릿을 향해 세 번 반복하는 “비텐베르크로 돌아가지 마라”는 대사였다.
르네상스를 거치며 신의 뜻에 따르는 공동체 속 존재였던 인간에게 ‘자아’와 ‘개인’의 개념이 자라났다. 라틴어가 아닌 각국 언어로 성서가 번역됐고, 셰익스피어도 영어로 된 영국 개신교도들의 ‘제네바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1517년,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걸었다.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쓴 것은 1599년~1601년이었다. 비텐베르크가 구시대와의 결별을 선언한 장소라면, ‘거기 가지 말라’는 말은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호들갑에 휩쓸리지 말고 이전 질서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명령이 된다. 신유청 연출은 “’햄릿’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고 했다.
“나는 이미 새 시대를 보고 왔는데, 새 시대를 보라고 날 비텐베르크로 보냈던 아버지는 살해당했어요. 근데 아버지의 동생이라는 괴물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머니와 결혼해 마땅히 내 자리여야 할 왕좌를 차지하고, 자기 중심으로 세상의 질서를 재편했는데, 모두가 이의제기 없이 그걸 따르고 있는 거예요. 햄릿은 생각했겠죠. ‘도대체 이건 뭐지?’” 신유청은 “처음 이렇게 해석한 순간 막 그 시대 속으로 다시 들어간 것 같았다. 당시 사람들은 비텐베르크가 세 번 강조될 때 바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동시대성, 시의성이 꿈틀꿈틀거리는 작품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시대는 끊임없이 세속적·종교적 권위를 가진 자들이 무엇이 죄인지 규정하고, 그걸로 사람들을 협박해 공포로 옭아매고, 면벌부를 팔아 경제적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자기의 언어로 성경을 읽고, 어떤 단체나 권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과 양심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세상은 그렇게 바뀌고 있는데, 햄릿의 엘시노어성에 사는 사람들은 옛 질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당연시한다.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건 잘못됐다고 얘기하면 ‘미운 오리새끼’가 된다. 그 외로움과 소외, 거기에 커진 자의식, 기존에 옳다고 믿어져온 것들에 대한 의심이 더해진다. 햄릿에게 ‘뭐가 잘못된 걸까’ 질문하는 감각들이 자라나는 시발점이다.
세계가 만들어낸 어떤 인물보다 햄릿이라는 고유명사의 아우라는 강력하고 거대하다. ‘햄릿’에 대한 해석도 분분했다. 신유청 연출의 ‘햄릿’은 아버지의 복수에 눈먼 아들도, 치정과 불륜에 치를 떠는 도덕주의자도, 트라우마와 망상증에 시달리는 정신질환자도 아니다. 그의 햄릿은 구시대의 질서와 불화하며, 옛것을 뚫고 나오려 애쓰는 인간이다. “관습과 구질서의 틀 속에 갇히고 박혀 있다가 조금씩 그 순환과 반복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 더 진보하려는 인간의 몸짓과 노력이 저에겐 위대하게 느껴져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 숙제 아닐까요.”
신유청 연출은 “한참 햄릿으로 고민할 때 한 시상식 자리에서 얼마 전 ‘햄릿’을 연출한 손진책 선생님을 뵀는데, 선생님 손을 덥석 잡고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더라”며 웃었다. “인간은 늘 어제의 후회에 갇혀 있고, 내일을 기대하고 살면서,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잖아요. 저는 ‘햄릿’이 관객들에게 던져지는 질문이 명쾌한 공연이 되면 좋겠어요. ‘아, 이게 햄릿이구나. 이렇게 쉬운 거구나’ 이렇게. 인간의 삶이 뭔지 답을 찾는 건 어렵고, 그 질문을 들고 살아가는 일은 여전히 길고 지루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요.”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