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 품에 수도 없이 안긴 아내…알고도 미소짓는 남편 있었다고? [히코노미]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10. 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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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코노미-7] 매일 밤 아내는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은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입니다. 가족 외출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준비를 마친 아내가, 남편과 가볍게 뺨을 맞댑니다. “다녀올께요.” 남편의 표정은 씁쓸합니다. 아내가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막을 순 없었습니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은 자신의 ‘상관’. 남편의 출세를 위한 ‘미인계’였던 셈입니다. 고관대작을 염원한 그는 아내의 외도를 눈감았습니다.

“남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미드 ‘다운튼 애비’의 한 장면. [사진출처=imdb]
남편은 아내의 노고를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 기울어가는 귀족 가문에 시집온 부잣집 딸. 남편의 출세를 위해 자신의 인맥을 최대한 활용했던 조강지처. 남편을 두고 어떻게 다른 남자와 연인이 될 수 있냐는 세간의 비난을 그가 귀담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랜돌프 처칠과 그의 부인 제니 제롬의 이야기입니다. 어디인지 낯이 익은 성. 맞습니다. 이 막장 부부의 아들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이었습니다. 경제사를 다루는 히코노미에 웬 정치인이냐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겠습니다. ‘세계화’라는 경제적 충격파가 ‘중매쟁이’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경제는 언제나 미시적 삶의 실타래를 흔들기 마련이지만, 때로는 역사의 변곡점을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하자면...” 1949년 대중 연설 중인 윈스턴 처칠.
세계화의 파고는 상류층도 덮쳤다
‘귀족의 몰락.’

19세기는 세계화의 시대였습니다. 미국 아메리카 광활한 대륙에서 생산되는 진귀한 물품과 황금빛 곡물들이 유럽 대륙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는 의미입니다. 세계화의 파고는 취약한 계층부터 닥친다지만, 때론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1800년대 잉글랜드 귀족들이 세계화 유탄을 그대로 맞았기 때문입니다.

자유무역은 영국의 부를 늘려놨지만 동시에 미국산 농산물 유입으로 귀족들의 수입을 급감시키기도 했다. 그림은 동인도회사의 런던 본사. 19세기 그림.
당시 영국 경제 상황에 대한 설명부터. 1800년대 들어 영국은 곡물법을 도입했습니다. 자국 농업을 보호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혜택은 농민과 귀족을 아우릅니다. 그들의 광활한 영지에서 수 많은 소작료를 얻어서였습니다. 높은 곡물 가격은 짭짤한 수입으로 이어지는 구조였습니다.

상황은 1840년 급변합니다. 당시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아일랜드에서 ‘감자 대기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끔찍한 풍경들. 감자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주먹을 휘두르던 민중들. 당시 총리였던 로버트 필은 지시합니다. “곡물법을 폐지하고 농작물을 값싸게 수입하겠다.” 당시 지식인 계층의 필독서였던 애덤 스미스의 ‘자본론’ 역시 자유무역에 힘을 실었습니다.

무역의 장벽이 무너지자, 곡물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아사(餓死) 직전 아일랜드 사람들에겐 작은 빛이었으나, 잉글랜드 귀족과 농민에겐 거대한 그림자였습니다. 곡물 가격이 폭락하면서였습니다.

“먹을 것이...아무것도 없구나...” 다니엘 맥도날드가 1847년 그린 아일랜드 대기근.
영국의 밀 가격은 1800년대 초 톤당 10파운드였지만, 1870년이 되면 3파운드로 떨어집니다. 3분의 1수준으로 폭락한 것이었지요. 대영지를 보유한 귀족들의 수입도 그만큼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저택과 윤택한 삶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세계화가 잉글랜드 귀족을 강타한 셈입니다.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귀족 작위를 유지하고 있던 처칠 가문(말보로 공작)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때 대서양에서 남루한 귀족에 손을 내밀 구원자가 도착했습니다. ‘달러 프린세스’라고 불리는 미국의 부잣집 딸들이었습니다.

런던에 몰려든 신붓감들의 정체는
“우린 귀족들과 결혼을 원하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걸출한 경제 거물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철도·철강·석유·백화점 등 거대한 산업이 미국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이끌던 시절입니다. 막대한 부에도 이들의 허영은 차오르지 않았습니다. 미국 사교계 상류층에 진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올드머니(Old Money)로 불리는 오랜 전통의 부자들은 이들을 “벼락부자”로 폄훼합니다. 유럽 귀족 출신으로서 오랜 세월 미국에 터를 잡은 이들만이 진짜 ‘상류’가 될 수 있었습니다. “Money can’t buy the class(돈으로 계급을 살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뉴욕시 매디슨 에비뉴에 있는 제롬가의 맨션. 제롬 가문은 엄청난 부를 일궜지만 결코 미국 상류 클래스에 들어갈 수 없었다.
욕망은 부정당할수록 들끓기 마련입니다. 신흥 부자들은 결코 포기를 몰랐습니다. 자신의 자녀에게만큼은 ‘귀족’이라는 타이틀을 어떻게든 달아주고 싶었습니다. 돈만 많은 벼락부자라는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미국 내 사교계의 견고함을 깨닫고 그들 새로운 행선지를 정합니다. 미국의 모든 상류층이 갈망하는 그곳. 그러나 결코 갈 수 없었던 그곳. 대서양 건너 영국 런던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온 부잣집 규수들은 영국 귀족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지적 수준이 절대 떨어지지 않는 데다가, 신대륙 특유의 발랄함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 남성 앞에서도 당당히 매력을 과시하는 모습에 점잖은 귀족들마저 쉽게 매료됩니다. 거기에 엄청난 재산은 또 어떻고요. 영국의 왕이었던 에드워드 7세는 미국에서 온 여성 손님들을 만나는 걸 열렬히 즐겼을 정도입니다.

“미국 규수들은 왠지 모르게 화끈하구만.” 19세기 후반 국왕 에드워드 7세.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인 그는 파티와 향락을 즐기는 군주였다.
‘달러 공주’들의 유럽 공습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가난한 잉글랜드 귀족들은 너도나도 미국 상속녀와의 혼인을 추진합니다. 경제 위기를 맞은 가난한 집안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정 형편상 강제로 혼인을 당한 건 비단 가난한 딸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던 셈.

잉글랜드 귀족 열 중 하나는 달러 공주와 결혼합니다. 가장 높은 계급인 공작(Duke) 서른개 가문 중에서 여섯개 가문이 ‘달러공주’와 결혼했을 정도였습니다. 귀천상혼을 금기로 여기던 영국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지요. 전 유럽으로 범위를 넓히면 450건이 집계됩니다. 세계화의 파고가 그린 역설적 풍경이었습니다.

파티가 여자의 매력을 뽐내기 가장 좋은 장소지. 미드 ‘다운튼 애비’ 중 한 장면. 왼쪽 엘리자베스 맥거번이 연기한 코라는 미국의 부유한 상속녀 출신으로 영국 귀족과 결혼했다. [사진출처=imdb]
엄청난 지참금이 영국 귀족을 살리다
결혼도 비즈니스라지만 잉글랜드 귀족에게는 그야말로 대박 사업이었습니다. 달러 공주들이 막대한 지참금을 안고 시집을 오면서였습니다. 철도 가문 밴더빌트 콘수엘로는 영국의 가장 명망 있는 말버러 공작과 혼인합니다. 지참금은 무려 오늘날 가치로 4억달러. 한화 5500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사탕수수로 큰돈을 모은 미국 사업가 안토니오 이즈나가도 딸을 맨체스터 공작 집안에 시집보내면서 1억 3000만 달러를 지급해야 했습니다. 미국 부자들의 ‘신분 콤플렉스’를 여실히 드러내는 액수입니다.

“아버지, 꼭 결혼에 이렇게 큰돈을 써야 할까요?” 콘수엘로 밴더빌트는 미국 철도왕 밴더빌트 가문의 여식으로 엄청난 지참금으로 영국 귀족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 끝은 좋지 않았다.
‘달러 프린세스’들 중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제니 제롬이었습니다. 뉴욕 금융가의 딸로 태어난 제니 제롬은 런던 사교 모임의 스타였지요. 화려한 외모에 수려한 언변이 런던 귀족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왕 에드워드 7세가 그녀를 유독 좋아했습니다. 에드워드는 런던 귀족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귀족 랜돌프 처칠을 소개해준 배경이었습니다.
“저와 결혼하겠어요?”. 윈스턴 처칠의 어머니 제니 제롬은 미국의 부유한 가문의 여식이었다. 수려한 외모와 언변으로 영국 사교계를 완전히 사로잡은 인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습니다. 제니는 명석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아우라를 뽐냈습니다. 랜돌프는 귀족으로서 제니에게 지금껏 누리지 못한 ‘신분’의 고귀함을 선물할 수 있었습니다. 1874년 4월 두 사람이 결혼에 성공합니다. 만난 지 6개월 만이었습니다. 지참금은 오늘날 가치로 30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400억원에 달하는 거액입니다. ‘레이디 처칠’로 불리기 위해 지급해야할 돈이었습니다. 이때 태어난 아들이 후에 영국의 영웅으로 자라날 ‘윈스턴 처칠’이었지요.
제니의 끝없는 외도가 남편의 성공을 불렀다?
결혼 후에도 제니는 여전히 영국 사교계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7세는 파티가 열릴 때마다 그녀를 찾았을 정도였지요. 제니 역시 빠지지 않고 왕의 곁을 지켰습니다. 남편의 정치적 성공을 위한 작업을 위해서였습니다. 때때로 에드워드 7세는 그녀를 자신의 침실로 불렀습니다. 그녀도 마다하지 않았지요. 랜돌프 역시 이를 알고도 묵인합니다. 그녀는 세르비아의 왕자 밀란 오브레노비치, 독일 외무장관 비스마르크와도 연인 관계였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랜돌프, 이것만 찍고 잠깐 나갔다 올게.” 제니 제롬과 랜돌프 처칠.
그녀의 혼외정사가 늘어날수록 남편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랜돌프는 ‘토리’라고 불리는 보수당 대표 자리까지 오르지요. 양처(良妻)와 악처(惡妻)의 경계에 제니가 있었던 셈이지요.

랜돌프와 제니가 닦아놓은 길에, 아들 윈스턴도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정부 주요 요직을 가기 위해서 필수적이었던 군대에 입대하지요. 처칠은 직접 쿠바 독립전쟁에 참전하고 싶어 어머니 제니의 힘을 빌리기도 했습니다. 뉴욕, 쿠바, 인도를 누비면서 윈스턴은 세계의 정세를 읽는 힘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파티에는 의상이 중요해. 에드워드 전하가 좋아하시거든.” 화려한 옷을 차려 입은 제니 제롬의 초상화.
“아내는 오늘 밤도 외출했다네.” 윈스턴의 아버지 랜돌프의 초상화.
1895년 아버지가 죽었지만, 어머니 제니는 그를 물심양면 지원했지요. 군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윈스턴은 정계로 나갈 발판을 마련합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수당 국회의원이 되면서였습니다. 제니는 어머니의 역할에만 구속되지 않았습니다. 본인의 연애생활도 즐겼기 때문입니다. 1900년 7월에는 본인보다 20살 어린 스코틀랜드 군인 조지 콘월리스 웨스트와 결혼합니다. 아들 윈스턴과 동갑인 사내였습니다.
“아들들아, 엄마의 연애사는 묻지들 말거라.” 제니 제롬이 아들 존, 윈스턴과 함께 찍은 사진.
세계화가 낳은 처칠, 세계화의 신봉자로
“자유무역은 대영제국 부(富)의 원천이오.”

세계화라는 파고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윈스턴은 자유무역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정계에서 자유무역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보수당은 그러나 세계화에 반감이 있었지요. 세계화로 폭락하는 곡물값이 귀족들의 경제적 몰락을 초래한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습니다.윈스턴은 소장파로서 당에 반기를 들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윈스턴이 적을 옮겨 자유당 정치인으로 20년이나 있었던 배경입니다.

“세계화와 자유무역은 신께서 주신 선물이네.” 젊은 시절의 윈스턴 처칠.
세계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히틀러의 등장이었습니다.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유럽은 화염에 휩싸입니다.

유일하게 항복하지 않았던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윈스턴 처칠이 있었습니다. 전임 총리 네빌 체임벌리가 히틀러에 신뢰를 드러낼 때도 그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1940년 5월 신임 ‘총리’ 윈스턴 처칠은 말합니다.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하늘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 땀, 눈물 뿐입니다.” 전 국민을 하나로 만드는 명연설이었습니다.

“히틀러에 대한 순진한 생각은 거두시오.” 윈스턴 처칠과 전임 네빌 체임벌린. 네빌은 히틀러에 대해서 유화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가 실각했다.
“내가 국민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피와 땀, 눈물, 그리고 승리 뿐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 위대한 정치인이었다.
윈스턴은 막연히 ‘승리’를 염원만 하는 어리석은 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나라’ 미국의 참전을 끊임없이 독려한 인물이 윈스턴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만이 이 전쟁을 끊을 유일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끊임없이 미국과 외교에 나선 이유입니다.
미국과 영국의 아들, 평화를 만들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집무실에는 윈스턴으로부터 온 수많은 서신이 쌓였습니다. 두 사람은 1941년 8월 캐나다 뉴펀들랜드에서 만났습니다. ‘대서양 헌장’(Atlantic Charter)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동맹은 단순한 군사적 협력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공동의 투쟁입니다.” 전 세계의 인권과 평화를 위한 양국의 협약이었지요. 현대 UN의 기초가 된 조약이었습니다.
“미국이 참전해야 세계의 평화가 찾아 온다오. ” 1941년 8월 HMS 프린즈오브웨일즈 갑판에서 만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 처칠.
헌장이 체결된 지 4개월 후,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합니다. 미국은 먼지가 쌓인 탱크와 비행기 엔진에 기름칠을 시작합니다. 그토록 고수하던 ‘고립주의’의 폐기였습니다. 이때 조용히 미소 짓는 남자. 윈스턴 처칠이었습니다. 그는 얘기합니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이상, 승리는 시간문제다. ”

4년 후, 억압받는 피식민 국가들 대다수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세계의 절반 이상은 승리를 향한 그의 집착, 미국 참전에 대한 그의 믿음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역사는 나를 좋게 평가할 것입니다. 내가 바로 역사를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 처칠은 언제나 자신을, 조국을, 역사의 진보를 믿었습니다. 확고한 신념 속에서 그는 자신의 길을 꾸준히 나아갔지요. 아버지의 나라 영국의 엘리트주의와 어머니의 나라 미국의 개척정신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세계화의 파고는 영국의 귀족을 무너뜨렸지만, 윈스턴이라는 거물을 낳았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격언, 역사를 설명하는 데 탁월한 문장입니다.

“대영제국의 위대한 거인이 떠나신다.” 1965년 윈스턴 처칠의 장례 행렬.
“역사는 나를 좋게 평가할 것이다. 내가 역사를 쓸 사람이기 때문이다. ” 처칠은 미국적 배포와 영국적 엘리트주의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제임스 거스리가 그린 처칠.
<네줄요약>

ㅇ19세기 세계화가 지속되면서 곡물가격 하락으로 영국 귀족들의 파산이 속출했다.

ㅇ이때 미국의 신흥 부자들의 딸들이 몰락한 영국 귀족들에게 시집가기 시작했다. ‘고귀한 신분’을 얻기 위해서였다.

ㅇ‘달러 공주’라고 불린 이들 중 한 명이 ‘제니 제롬’. 그녀는 이 결혼으로 아들 윈스턴 처칠을 낳았다.

ㅇ처칠은 어머니의 나라 미국에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끈질기게 요청해 결국 이를 받아냈다. 세계화가 만든 비국이 희극으로 바뀐 셈이다.

‘경제’는 맛보기에 어려운 식재료입니다. 채권, 이자, 화폐라는 단어만 들어도 쓴맛이 올라옵니다. 맛있게 즐기려면 ‘역사’라는 양념이 필요합니다. 히스토리와 경제를 결합한 연재물 ‘히코노미’는 먹음직한 요리를 내는 걸 목표로 합니다. 격주로 여러분의 경제 근육을 키워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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