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국극’의 시대정신과 청년 여성의 성공 서사

한겨레 2024. 10. 26.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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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진의 드라마로 보는 세상
tvN 드라마 ‘정년이’
드라마 ‘정년이’. 티브이엔(tvN) 제공

동족상잔의 참상이 여전했던 1950년대 중반, 전쟁에서 비롯한 죽음과 기아의 공포가 전후 사회를 지배했다. 하지만 삶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야만의 전쟁이 남긴 상흔 속에서 실존을 고뇌했고, 누군가는 묵묵히 주어진 삶에 충실하면서 생존을 모색했다.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이었지만, 간난의 세월을 살아냈다는 점에서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1950년대를 풍미했던 여성국극도 그중 하나다. 전쟁의 폐허에서 생존을 모색했던 사람들의 고단한 일상을 위로하고, 가부장적 봉건 의식에 억눌렸던 여성의 꿈을 응원하면서 당대의 문화예술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청년 여성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정년이’는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시나브로 존재감을 잃어버린 1950년대 여성국극에 관한 드라마다. “왕자가 사라진 이 시대의 왕자가 되어” 관객의 심금을 울렸던 여성국극을 형상화한 동명의 웹툰이 원작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웹툰과 다른 관점에서 여성국극을 주목한다. 웹툰이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여성국극을 주목했다면, 드라마는 청년 여성의 성장과 성공 서사에 초점을 맞춘다. 왕자 배역으로 인기를 모은 여자 배우가 등장하지만 그가 왜 남자 역할을 맡아야 했는지 말하지 않는 방식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대에 오를 수 없었던, 그래서 남자가 여자 역할까지 맡았던 억압적 시대의 풍경이 드라마에서 전경화되지 않는 이유다.

윤정년(김태리)은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소리를 포기한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은 천재 소리꾼이다. 소리가 돈이 되는 세상 이치를 일찌감치 깨달았지만, 소리를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불호령 때문에 답답해한다. 때마침 목포 공연을 왔던 매란국극단의 스타 문옥경(정은채) 덕분에 윤정년은 여성국극의 신세계를 경험한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자명고’ 공연을 관람하면서 황홀경을 느낀 그는 여성국극 무대에 서겠다는 꿈을 키운다.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음껏 소리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서울로 올라가 입단 시험을 거쳐 매란국극단의 보궐 연구생이 된다. 우여곡절 끝에 연구생 공연 ‘춘향전’의 방자 역할을 자기 색깔로 탁월하게 표현하여 인정받고,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자신감이 넘친다.

그러나 성장과 성공 서사에는 반드시 시련이 따른다. 윤정년은 연구생 동기를 돕기 위해 다방 일을 하다가 매란국극단에서 쫓겨나는 위기에 봉착한다. 매란국극단의 이름을 팔아 노래 부르지 말라는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방송국 프로듀서의 도움으로 가수 데뷔 준비를 하지만,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걸 바로 깨닫는다. “텔레비전이 지배할 세상에서 국극을 한다는 건 무엇일까?”라는 질문 속에 돌아간 국극 무대에서 윤정년은 스스로 존재감을 입증하며 성장한다. 천부적 재능이 아니라, 뒤늦게 자각한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는 승부사의 근성으로 가부장적 봉건 의식이 팽배했던 억압의 시대에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드라마 ‘정년이’의 국극 장면. 티브이엔(tvN) 제공

윤정년의 성장과 성공 서사는 분명 매력적이지만 허전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서양 문화가 확산하면서 전통 문화예술이 위축되었던 1950년대에 판소리 기반의 여성국극이 대중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시대 상황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봉건 의식이 팽배했던 1950년대에 ‘여성’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회적 약자였다. 전쟁기에 미군을 통해 유입된 서양 문화의 위세로 인해 ‘국극’ 또한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국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던 두가지가 결합한 여성국극에 쏟아진 박수갈채는 시대에 억압당했던 존재들이 표현하지 못했던 욕망의 발로다. 객석의 관객 반응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상황 연출이 필요한 이유다.

매란국극단의 강소복(라미란) 단장은 연구생들에게 어떤 순간에도 예술가임을 잊지 말라고 가르친다. 예술에도 급이 있다며 국극을 무시하고, 국극 배우들을 노류장화처럼 여기는 세상과 맞서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강소복 단장의 바람대로 윤정년은 예술가로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여성국극에 환호했던 관객의 욕망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의 성공은 미완에 그칠 것이다.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을 위로하고, 생계유지에 허덕이던 청년 여성이 꿈을 꿀 수 있게 희망을 주었던 여성국극의 시대정신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윤정년의 성공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를 것이라는 의미다. 주류 역사가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여성국극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드라마 ‘정년이’의 재미가 배가되지 않을까 싶다.

충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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