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앞두고 청량리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청계천 옆 사진관]

변영욱 기자 2024. 10. 26.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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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사진 No.84


● 앙상한 나무 아래 흐르는 개울물

개울가에서 빨래를 마친 아낙네가 머리에 빨래 바구니를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있습니다. 아직 마무리를 못한 한 사람은 흐르는 물에 여전히 옷을 헹구고 있습니다.

수도가 보편화되고 세탁기가 빨래를 하는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진 풍경입니다. 성큼 다가온 겨울 날씨 탓에 꽤 차가운 물이었을 텐데 손에 동상을 입지는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에는 따듯한 온수를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추운 날씨에도 개울가에서 빨래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 서리 맞은 앙상한 가지 ◇ =어제 청량리에서/ 1924년 10월 21일 동아일보 사진의 일부
지금은 농촌 풍경을 찾아볼 수 없지만 100년 전 청량리는 계절의 변화를 그대로 드러내는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진기자들은 계절이 변하는 시기가 되면 청량리로 가서 풍경 사진을 찍어 신문을 통해 보도했습니다. 따스한 봄볕도, 추운 겨울을 알리는 서리도 시내에서 가까운 농촌인 청량리에서 촬영되었습니다. 이 사진도 마찬가지구요. 서울에 첫 얼음과 첫 서리가 내렸다는 기사입니다. 기사를 보시겠습니다. 첫 번째 문단은 기사라기 보다는 한 편의 시같은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시 기자들은 사실 전달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표현도 자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경성에 첫 얼음과 첫 서리

첫 얼음 4일, 첫 서리 9일 늦어
어제 이른 아침 최저 온도 영하 1.5도

◇앉아 있는 사람이나 길가는 사람이나 내려 쪼이는 여름 더위에 쫓기고 부대끼어 하루를 열흘 같이 성화로 보내며 이마 위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쉴 새 없이 뚝뚝 떨어지던 여름철도 어느덧 자취 없이 가버리고 또다시 그 뒤를 이어 가을조차 몇 날이 못되어 마지막을 고하고 이제야말로 아침저녁 으로도 방안에서 손발이 선듯선듯한 겨울철을 확실히 당한 모양 같다. 더욱이 그저께 아침부터 불어오는 경성 시내의 초겨울 쌀쌀한 바람은 마친매 어제 아침에 이르러 금년에 이르러서는 첫번째 되는 서리(霜)가 오고 물이 얼었다는데 얼음(氷)의 부피는 팔분(八分)이나 되며 작년의 첫 번째 얼음보다는 매우 두터웠으며 금년의 첫 서리와 첫 얼음을 작년에 비하면 얼음은 나흘 동안이 이르고(빠르고)서리는 아흐레 동안이나 늦었다는데 어제 아침의 최저 온도는 영하 일도반이었으며 갑자기 이렇게 추워진 것은 중국 북부에 고기압이 일어나서 조선 안으로 발전된 까닭이더라.

〈1924년 10월 21일 동아일보〉

● 1953년까지도 농촌이었던 청량리

기사에 따르면 이틀 전 아침부터 서울 시내에 찬바람이 불더니 어제 아침에는 겨울 들어 첫 서리가 내리고 얼음도 발견되었다는 군요. 한 해 전이었던 1923년에 비하면 얼음은 4일 빠르고 서리는 9일 늦었습니다. 중국에서 발달한 고기압이 한반도로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싣고 있습니다. 지금도 기상청에서는 이와 비슷한 분석을 하고 있는데, 100년이 지났지만 날씨를 분석해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기본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청량리는 언제까지 농촌이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동아일보 DB를 검색해보니 1970년대 말에는 청량리역을 통해 외곽으로 나가려는 많은 여행객들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대학생이던 1990년대 초에도 청량리역에서 강원도쪽으로 엠티를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의 청량리역 주변은 대형 상가들과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당시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서울의 중심은 아니고 동쪽으로 나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변두리 지역이었습니다.

연말연시에 중앙선 등지로 떠나는 열차 승차권을 예매하고 있는 청량리역 창구 . 1981년 12월 26일 동아일보 DB 사진.

청량리는 언제쯤 농촌에서 도시로 변모한 것일까요? 해방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서울 도시계획을 담당하는 공무원이었던 손정목 선생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 (도서출판 한울) 제 1권 131쪽에서 청량리 개발의 흔적을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던 당시의 서울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던가. 우선 서울 시내, 또는 서울 시가지라는 것은 어디에서 어디까지였을까. 사대문 안은 일단 시가였다. 동대문을 나가면 신설동까지 큰길가에는 집이 들어차 있었지만 그 밖은 논과 밭이었다. 신설동 남쪽에는 경마장이 있었으니 인가는 별로 없었다. 신당동에는 집이 들어서 있었지만 지금의 금호동·옥수동 일대는 산이었다. 왕십리에도 큰길을 따라 양쪽에 는 집이 연이어 있었지만 지금 한양대학교가 있는 일대에는 주택보다는 미나리팡이 더 많았다. 성동교도 나무다리였고 그 동쪽에는 논과 밭뿐이었다.”

1950년대에 서울 신설동도 논과 밭이었으니 그보다 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청량리 역시 농촌 마을이었던 것입니다.

● 도시가 시작되던 중 수해로 물에 잠긴 청량리

그러다가 1960년대부터 집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청량리의 60년 남짓 전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이 한 장 있어 소개합니다. 1966년 수해를 입은 청량리와 이문동 일대 항공 사진입니다.

1966년 7월 26일 오전 9시 -노한 탁류는 삽시간에 집을, 길을 가라앉혔다. 청량리와 이문동 일대. (본사 파랑새호에서 최경덕 촬영·박명 조종)/ 동아일보 DB
이 사진은 당시 동아일보가 보유하고 있던 경비행기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농촌 지역과 산비탈을 개간하고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 사진을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청량리는 홍수에 취약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겨울을 알리는 기사와 함께 청량리 개울가의 풍경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한 장의 사진이 담고 있는 시대상과 도시의 변화, 그리고 자연과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댓글로 남겨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 백년사진에서 소개한 ‘소년군’은 지금의 ‘보이스카우트’라는 댓글이 있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넘쳐나는 오늘을 살면서,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한 장씩 살펴봅니다. 독자들의 댓글을 통해 우리 이미지의 원형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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