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왕후의 국정개입 금지한 130년 전 갑오개혁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2024. 10. 2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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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명성황후’가 내년 30주년을 맞는다. 1997년 아시아 뮤지컬 최초로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 첫날 주연을 맡았던 김원정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성격, 두 사람의 관계, 그리고 조선의 운명을 가장 잘 드러낸 대목이 환궁 장면이라고 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피신한 황후가 살아 돌아오자 고종이 감격에 겨워 복받치듯 애정을 쏟아낸다.

“거칠고 사나운 폭도에 쫓겨/ 거친 들을 헤매던 가여운 그대
이제야 그대를 다시 또 맞으니/ 꿈에서 깨인 듯 구름 걷힌 듯
안심하시오. 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않으리다.”

그러자 황후는 단호하고도 위엄 있는 음색으로 이렇게 받아 노래한다. “이제 국왕의 권위 되찾고/ 외세 각축을 방비하소서.”

즉 황후에게는 절절한 사적(私的) 애정보다는 국왕의 권위와 국가의 종묘사직이 더 중했던 것이다.

● 명성황후는 “가여운 그대” 아니었다

왜 난데없이 명성황후냐고? 현 정치상황과 전혀 관계없다. 내 젊은 연극기자 시절 탄생한 작품이라 내겐 기억도, 사연도 각별할 뿐이다(마침 12월부터 30주년 기념공연이 시작된다).

원작 희곡 ‘여우사냥’을 쓴 이문열은 25주년 기념공연 무렵 한 인터뷰에서 “마음먹고 매달리면 질기기가 쇠심줄 같은 친구(연출가 윤호진)가 등 떠밀어 쓴 작품”이라며 “명성황후에 대한 애정이 없어 처음엔 곤혹스러웠다”고 했다. “일본 자료와 달리 영미권 자료는 명성황후에 우호적이라서 도움이 됐다. 하기사 증오도 문학생산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 증오도 열정이다.”

그렇게 그려진 황후의 캐릭터는 뛰어난 지략으로 “전하를 위해, 만백성 위하여, 이 한 몸을 바치리다”던 ‘조선의 잔다르크’다. 선교사이자 여의사로 1889년 언더우드 목사와 결혼해 15년간 조선에 살았던 언더우드 부인도 ‘폭넓고 진보적인 정책에 탁월성을 보였고 애국적이었으며 또 조국의 최대 이익에 헌신했고 동양의 왕비들에게 기대되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고 조선견문록 ‘상투의 나라’에 썼다.

● “짐이 근심하면 황후는 대책을 세워주었다”

이런 황후를 고종이 깊이 의지한 것은 당연했을 터다. 고종은 ‘어제행록’에 이렇게 적었다.

‘순간공(황후의 부친 민치록)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두세 번만 읽으면 곧 암송하였다…(중략) 슬기로운 지혜는 타고난 천성이어서 기미를 아는 것이 귀신같았다. 어려운 때를 만난 다음부터는 더욱 살뜰히 도왔으므로 짐의 기분이 언짢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아침까지 기다리고 앉아 있었으며 짐이 근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올려주었다.’(고종실록 1897년 11월 22일)

이희주 ‘명성황후 평전’ 표지
고종은 인사문제부터 외교 전략에 이르기까지 정치 전반에 걸쳐 뛰어난 정치력을 보여준 황후를 훌륭한 내조자로 회상하고 있다(이희주 ‘명성황후 평전’). 이런 왕과 왕비의 관계는 당시 백성들 사이에도 소문이 파다했던 모양이다. 지식인의 야사(野史)로 볼 수 있는 황현의 ‘매천야록’은 1874년, 그러니까 꼭 150년 전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던 해 이렇게 썼다.

‘황후는 총명하고 민첩하며 권변(權變)의 계략이 풍부하여 항상 임금의 측근에서 임금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필했다. 처음에는 임금에 의지해서 사랑과 미움을 나타냈지만 시일이 지남에 따라 제 마음대로 방자함이 날로 심해졌으며 임금이 도리어 제재를 받는 바가 되었다.’

● 상소문을 당일 받아볼 만큼 권력 공유

명성황후가 남긴 한글편지 146통을 분석한 장영숙 상명대 계당교양교육원 교수의 최근 연구를 보면 구체적 실상을 알 수 있다. 1882년 임오군란 직후부터 1894년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주로 생산됐는데 인사와 매관매직 문제가 가장 많고(47.3%) 다음이 국내 정치(7.5%), 국제문제와 대원군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는 내용이 각각 4.1%, 나머지는 일상적 안부편지였다(2024년 ‘명성황후의 국정 개입 실태와 권력 행사 방식 연구’).

명성황후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 동아일보 DB

주목할 만한 점은, 황후가 ‘조정에 올라오는 상소를 당일에 바로 받아볼 정도로 정치적 현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883년 임오군란 위기를 극복했다며 국왕 내외의 공덕을 칭송하는 성대한 행사를 열자는 상소에 형조참판이 반대상소를 올리자 황후가 “편지의 구절이 몹시 통분하다”며 분노를 표출하는 식이다. 이는 명성황후가 제가문(諸家文)과 사기에 통달해 백관의 장주(章奏·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던 글)를 친히 봤다는 당대의 소문이 한갓 떠도는 얘기가 아니었음을 실증한다.

정치문제에 개입해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은 물론이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급진 개화파 박영효를 국왕 편으로 끌어들이려 애썼던 것을 비롯해 황후는 외국공사의 동향과 청국 주요 행사를 챙기는 등 기민하게 대응했다. 이런 권력행사와 정치참여는 고종의 내략 위에 행해졌다는 점에서 그들은 권력을 공유했던 운명공동체였다는 분석이다.

뮤지컬 ‘명성황후’ 20주년 기념공연에서 고종과 명성황후가 외국 대사들과 파티를 열고 있는 장면. 동아일보 DB

● 정치개혁은 왕권제한과 왕후 관여 금지

꼭 130년 전 시작된 갑오개혁(1894.7~1896.2)은 조선이 명나라를 모델삼아 500년에 걸쳐 구축한 주자성리학 봉건체제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하는 근대국가 체제로 전환되는 분수령이었다(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Ⅳ’). 특히 정치부분에선 군주권 제한이 핵심인데 그 일환으로 정부조직개편과 함께 왕실개혁이 이뤄졌다. 조선왕조는 전통적으로 궁부일체론(宮府一體論), 즉 궁중과 부중이 공(公)의 가치로 일체가 돼야 한다고 믿어왔다. 왕실개혁의 요체는 궁중과 부중의 분리, 즉 왕실과 국가의 구별이었다(2024년 양진아 논문 ‘개혁기 왕실 개혁 추진과 왕실 관련 법령의 구상’).

1894년 12월 고종이 발표한, 한국사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라고 볼 수 있는 홍범14조 중 다섯 조문이 왕실개혁에 관한 것이다. 일단 4조까지만 봐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다.

제1조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제2조 왕실 전범(王室典範)을 작성하여 대통(大統)의 계승과 종실(宗室)·척신(戚臣)의 구별을 밝힌다.
제3조 국왕(大君主)이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되, 왕후·비빈·종실 및 척신이 관여함을 용납지 않는다.
제4조 왕실 사무와 국정사무를 분리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 ‘왕후 국정관여 금지’ 삭제… 근대화 개혁 실패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삼국간섭이라는 암초를 맞는다. 조선이 러시아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자 일본은 왕실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왕후의 정치 관여를 금지하는 구절을 삭제했다. 이로써 왕실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근대화를 간단히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핵심은 개인의 자유와 소유권이고, 왕권의 제한이라고 본다. 1729년 영국을 방문한 몽테스키외는 “법으로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데 성공한 영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민”이라고 감탄했다. 집단이 아닌 개인이 주체가 되고, 과학적 사고와 합리성이 전통적 사고를 대체하며, 자본주의가 발흥해 궁극적으로는 산업화로, 정치적 민주화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박지향 ‘근대화의 길’). 근대성이 처음 구현된 곳이 영국이고 아시아에선 일본이었다.

갑오개혁 실패 뒤 1896년 창설된 서재필의 독립협회는 민(民)의 계몽에 힘쓰며 왕권의 제도적 제한을 주장했다.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이런 서재필을 고종은 증오했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한 고종은 독립협회를 강제해산시켰다. 독립협회 복설을 요구한 만민공동회 역시 실패로 끝났다. 1899년 황제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통해 스스로 무한 군권(君權)을 보유한 전제군주임을 선언했다.

● 제왕적 대통령제… 대한민국은 근대국가인가

근대국가를 꿈꾼 개혁세력이 극복하지 못한 장애물은 외세의 각축이나 근왕주의 세력의 공격만이 아니었다. 백성의 심성에 깊이 각인된 국왕에 대한 전근대적 충성심과 왕권에 대한 동경이라고 김종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분석했다(2017년 논문 ‘국=가와 국/가; 왕권을 둘러싼 정치투쟁과 대한제국).

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대통령제에 대한 집착이 혹시 우리 심성에 남아 있는 왕권에 대한 동경은 아닌가. 제왕적 대통령과 선출되지 않은 그 일가에 대한 충성심이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전근대성은 아닌가. 대한민국은 과연 근대적 국가인가.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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