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새 두 번 투르뒤몽블랑…첨엔 눈물로, 후엔 선수로 [ESC]
지난해 여권 숙소에 두고 나서
국경 넘는 버스 못타…두발로 복귀
올해 ‘울트라 트레일 몽블랑’ 출전
‘1년전은 올해 완주 위한 답사’ 돼
데 프레 산장에서의 저녁 식사는 근사했다. 샐러드와 바게트로 허기를 달래니 맛있는 냄새와 함께 주방에서 메인 음식이 나왔다. 오늘의 메뉴는 치킨 카레였다. 한 테이블당 네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접시 위의 요리를 나누며 그날의 여행에 관해 이야기했다. 주로 어디에서 출발해 얼마나 걸었는지 묻는 것을 시작으로 이름은 무엇인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투르뒤몽블랑(TMB)은 어떻게 오게 됐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행자들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그래도 다들 피곤했는지 소등 시간인 밤 9시가 되자 약속이나 한 듯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층침대가 두 대씩 배치된 10여 개의 객실은 모두 만원이었다. 예약한 손님 중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취소한 사람이 생긴 바람에 나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샤모니에서 새벽 버스를 타고 이렇다 할 계획도 없이 무작정 발 가는 데로 걸어 여기까지 당도한 오늘 하루의 일이 마치 전생처럼 까마득했다. 무척 긴 하루였다.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한기에 이불을 정수리까지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거세게 불어대는 강풍 소리를 들으니 이 높고 깊은 산속에 내 한 몸 누일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이틀 간 75㎞ 이동, 무슨 정신으로?
다음 날 아침이 오기도 전에 눈을 떴다. 새벽 5시에 핸드폰 알람을 맞춰놨는데 정확히 4시55분에 잠에서 깼다. 더할 나위 없이 안온한 밤이었다. 코를 골며 곯아떨어진 같은 방 여행자들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날 미리 싸둔 배낭을 둘러메고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왔다. 산속은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으로 막혀 있었다. 하지만 머리 위 하늘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수많은 별이 나아가야 할 길을 조금씩 밝혀 주고 있었다. 헤드랜턴을 켜고 굽이진 산길을 한참 동안 내려왔다.
머릿속은 샤모니로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레 우슈에서 데 프레 산장까지 어제 하루 30㎞가량을 이동했다. 놀랄 만큼 대단한 거리는 아니었다. 하루 꼬박 움직인다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거리였다. 다만 귀국일까지 남은 시간이 겨우 3일이었다. 하루 평균 30㎞를 움직인다고 계산해도 투르뒤몽블랑 160㎞ 전 구간을 완주할 수는 없었다. 어젯밤처럼 운이 따라 현장에서 숙소를 구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고, 중간에 무슨 변수가 어떻게 생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매일 30km 이상 갈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다. 새벽부터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한 이유였다.
조베 평원을 거쳐 보놈 고개로 이동하는 동안 대지는 사방에서 붉은빛을 내뿜으며 조금씩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대한 산맥이 만든 깊은 그늘 속을 한동안 걷다가 해발 2479m의 크루아뒤보놈을 넘는 순간 그날의 찬란한 태양과 마주했다. 트리코 고개에 이어 또 하나의 산을 넘었다. 높은 산에 올라야만 볼 수 있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은 환희와 동시에 일종의 허무였다. 한쪽으로 더 높은 지대로 연결되는 길이 이어져 있었으나 고민할 여지 없이 마을로 내려가야 했다.
레샤피유의 작은 매점에서 물과 빵 등을 보급하고 세뉴 고개로 발길을 서둘렀다. 해발 2516m의 세뉴 고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이다. 세뉴 고개를 넘으면 비로소 이탈리아이고, 터널을 통해 샤모니로 직행하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쿠르마유르에 도착할 것이다. 쿠르마유르는 이탈리아 북부를 대표하는 산악 도시다. 물론 쿠르마유르까지 갈 길이 멀었지만 한 줄기 희망이 보이니 힘이 났다. 쿠르마유르에서 샤모니로 가는 버스는 자정 가까이에도 있어 제법 여유가 있었다. 목적지가 정해지자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가까스로 쿠르마유르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6시였다. 오늘 하루만 45㎞ 가까이 이동했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온 걸까? 세뉴 고개를 넘는 순간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저 저 멀리 신기루처럼 희미한 쿠르마유르만을 응시하며 오직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돌진한 것밖에는. 샤모니로 돌아가는 저녁 8시 차편을 예약하고 버스터미널 근처 피자집에서 허겁지겁 배를 채우며 지난 이틀간의 여정을 회상했다. 레 우슈에서 쿠르마유르까지 총 75㎞를 이동했다. 투르뒤몽블랑 전체 구간을 완주하려면 무려 그 이상에 해당하는 길이 더 남아 있었다.
전투하듯 긴 길 걷고 뛰어
문득 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온 걸까? 집도 절도 없이 떠다닌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온 우주가 힘을 합해 나를 도와줄 거라는 이 밑도 끝도 없는 믿음의 출처는 어디일까? 가벼운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미련은 추호도 없었다. 어제오늘 전투하듯 긴 길을 이동하느라 지쳐 있었다. 오늘 밤은 샤모니의 따뜻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보낼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자리에 앉아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5분 후 버스는 출발했다. 터미널에 나만 남겨둔 채….
대관절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버스표를 확인하러 자리에 온 운전사가 이내 요청한 것은 다름 아닌 ‘여권’이었다. 여권이라니? 여권이 왜 필요하지? 여권이라면 샤모니의 게스트하우스 창고 안에 보관하고 온 60ℓ짜리 배낭 깊숙한 곳에 있었다. 소중한 여권인 만큼 분실하면 안 되니까 안전한 곳에 맡기고 떠나온 터였다. 그런데 왜 지금 여기서 여권을 찾는 거지? 이유는 단순했다. ‘국경’을 넘어야 하니까. 버스를 타고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까지 터널을 통과해 국경을 넘어야 했다.
걷는 동안 나는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레 우슈에서 출발해 수많은 산을 넘었고 그중에는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경계에 솟은 세뉴 고개도 있었다. 세뉴 고개는 오늘 아침 넘은 산이었다. 산을 넘는 동안 어디서도 여권 검사를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의 인식 속에 투르뒤몽블랑은 하나의 세계였다. 길은 하나였고 이어져 있었다. 시작과 끝이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산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였다. 산에서 내려온 이상 세상의 법규를 따라야 했다. 여권이 없으면 절대 국경을 넘을 수 없었다. 2023년 9월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2024년 8월 30일, 나는 다시 쿠르마유르 광장에 서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국제 트레일러닝 대회인 ‘울트라 트레일 몽블랑(UTMB)’에 출전하기 위해서다. 내가 출전하는 부문은 그중에서 시시시(CCC) 코스로, 이탈리아 쿠르마유르에서 출발해 스위스 샹페를 경유해 프랑스 샤모니로 골인하는 100㎞ 경기였다. 세 지역의 머리글자를 따서 시시시 코스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자그마한 트레일러닝 배낭을 메고 대회 출발선으로 이동하기 위해 쿠르마유르 버스정류장을 지나는 동안 1년 전 밤의 일이 떠올랐다. 여권이 없어서 버스에서 강제로 내려야 했던 사건. 버스를 타고 결국 그날 샤모니로 돌아가지 못한 사건. 그래서 그날 이후 어떻게 됐느냐면, 결국 걷고 달려서 샤모니에 도착했다. 물론 여권이 필요 없는 산을 넘어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육로를 통해 샤모니로 넘어갈 방법은 없었다. 샤모니의 게스트하우스 창고 안에 보관하고 온 60ℓ짜리 배낭 안에 숨겨 놓은 여권을 나에게 가져다줄 사람은 없었다.
한국에서의 일정이 있었기에 출국일을 옮길 수도 없었고 취소 수수료도 무시할 수 없었다. 버스정류장 근처의 호텔에 들어가 울며 겨자 먹기로 한화 30만 원에 육박하는 숙박비를 지불하고 일단 그날 밤을 보냈다. 갈지 말지가 아니라, 갈 수 있을까가 아니라, 무조건 가야 했다. 투르뒤몽블랑 지도를 바닥에 펼친 채 한참 들여다봤다. 지상의 길로 국경을 넘을 수 없다면 천상의 길로 넘는 수밖에. 내일 새벽 출발해 스위스 샹페까지 이동하면 모레쯤 발므 고개를 넘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발므 고개는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이었다. 발므 고개만 넘으면 그 뒤로 샤모니까지 다시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갈 수 있었다.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
2024년 8월30일 현지 시각 오전 9시, 세계 각국에서 출전한 2300여 명의 선수와 함께 쿠르마유르 광장을 출발했다. 첫 번째 고개인 라 트홍슈까지는 9㎞에 불과했으나 누적 상승고도는 1500m에 가까웠다. 함성과 함께 드넓은 거리로 쏟아지듯 달려 나가던 2300여 명의 선수는 좁은 등산로 입구부터 일렬로 늘어서서 개미처럼 산을 올랐다. 라 트홍슈 고개를 넘자 알베르토 산장이 나타났고, 이후 샹페까지는 꿈에 나올 듯 익숙한 길이었다. 1년 전, 걱정과 불안을 안고 눈물로 넘었던 투르뒤몽블랑 코스였다.
그때는 내가 1년 후 100㎞ 트레일러닝 대회에 출전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것도 투르뒤몽블랑 코스를 도는 울트라 트레일 몽블랑에 말이다. 당장 오늘 저녁 샹페까지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쿠르마유르의 화려한 호텔에서 값비싼 수업료를 치른 대가로 나는 두 가지 확실한 교훈을 얻었다. 첫째, 여행 중 여권은 반드시 몸에 소지할 것. 둘째,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 1년 전 데 프레 산장에서, 쿠르마유르에서, 그리고 샹페에서 나 홀로 세 번의 새벽 어스름을 뚫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던 순간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샹페는 시시시 코스의 중간 지점이자 54㎞ 체크포인트(경기 중 선수가 급수와 보급을 받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지점)였다. 샹페는 추억 깊은 마을이었다. 1년 전 쿠르마유르에서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국경인 페레 고개를 넘어 샹페에 도착하던 늦은 오후, ‘됐어, 거의 다 왔어’라고 속으로 되뇌며 바라보던 석양은 출발할 때 보던 아침 태양과 다른 듯 닮아 있었다. 이튿날 새벽 샹페를 출발해 정오경 발므 고개를 넘자 국경 너머로 프랑스가 펼쳐졌고, 그날 오후 나는 버스를 타고 무사히 샤모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예매한 항공편을 타고 한국까지도 무사히 귀국했다.
샹페에 도착하면 샤모니까지 거의 다 온 거라는 생각이 1년 후 100㎞ 트레일러닝 경기를 치르는 데도 도움이 됐다. 이제 남은 거리는 46㎞. 투르뒤몽블랑 코스에서 조금 빗겨 가는 구간도 있었으나 시시시 코스는 대체로 투르뒤몽블랑 코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달리는 내내 1년 전 장면이 오버랩됐다. 혹시 그날의 투르뒤몽블랑은 1년 후 울트라 트레일 몽블랑 대회 완주를 위한 코스 답사였을까? 그날 배낭 안에 여권이 있었다면, 그래서 쿠르마유르에서 샤모니까지 버스를 타고 한달음에 이동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씩씩하게 이 길을 달릴 수 있었을까? 이런 것을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트레엔트와 발로신을 지나 시시시 코스의 마지막 고비인 해발 1875m의 라 플레제르에 자정을 넘겨 도착했다. 라 플레제르는 내가 사랑하는 하늘 호수 라크블랑으로 향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샤모니까지 남은 거리는 이제 7㎞. 내리막길만 남았다. 어둠을 통과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익숙했다. ‘됐어, 거의 다 왔어’라고 속으로 되뇌며 남은 길을 달려 나갔다. 그리고 2024년 8월31일 현지 시각 새벽 2시30분, 트레일러닝을 시작한 지 정확히 10년이 되는 해인 올해 나는 처음으로 100㎞ 울트라 대회에 도전해 완주했다. 기록은 17시간 29분37초였다.
장보영 등산여행가
스물다섯 살에 우연히 오른 지리산에 매료된 이후 히말라야와 알프스, 아시아의 여러 산을 올랐다. 그러다 산을 달리기 시작했고 산악 잡지도 만들었다. 지은 책 ‘아무튼, 산’은 산과 함께한 청춘의 후일담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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