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회복으로…『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노란무늬영원』 [심층기획-논픽션 한강 격류 제7화]

김용출 2024. 10. 26.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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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그러나 나의 과거를 사랑할 수 있다면/ 내가 추억의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고등학교 때 짝꿍을 통해 알게 된 노래 「행진」, 시골에서 보낸 유년을 생각나게 하는 「엄마야 누나야」, 젊은 어머니가 수줍게 부르던 「짝사랑」, 옹이 박힌 나무 등걸 같은 아버지의 음성과 어울리는 「황성옛터」, 몸과 마음이 지쳐 있던 사회 초년병 시절을 버티게 해준 「You needed me」, 들을 때마다 마음이 두근거리는 동물원의 「혜화동」, 방황하던 청년들이 목이 터져라 부르던 「내 사랑 내 곁에」, 우울함으로 곤두박질치던 시절을 구해준 「Let it be」, 강원도행 밤기차의 굉음을 기억나게 하는 「500miles」, 삶을 축제로 만드는 마법의 목소리 「인생이여 고마워요」….

자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부르는 한강. KBS 유튜브 캡처.
2007년 1월, 한강은 자신의 삶을 가로지른 노래 22곡과, 이들 노래에 스민 기억이나 몰래 감춰둔 불빛 같은 이야기를 펼쳐놓은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비채)를 출간했다. 다채로운 노래 스물두 곡에 새겨진 이야기는 정갈하고 섬세한 문장에 실려 공명을 일으킬 지도. 고요하고 잔잔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안녕이라 말해본 사람/ 모든 걸 버려본 사람/ 위로받지 못한 사람/ 당신은 그런 사람/ 그러나 살아야 할 시간 살아야 할 시간/ 안녕이라 말했다 해도/ 모든 걸 버렸다 해도/ 위안 받지 못 한다 해도/ 당신은 지금 여기/ 이제는 살아야 할 시간 살아야 할 시간/ 이제 일어나 걸을 시간….”

조용하면서도 감미로운 표제곡 「안녕이라 말했다 해도」를 비롯해, 자신이 직접 작사 및 작곡하고 노래까지 부른 CD 「안녕이라 말했다 해도」를 첨부하기도 했다. 첨부된 CD에는 나무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한 「나무는 언제나 내 곁에」, 밤과 낮이 바뀌는 경계의 떨림을 노래한 「새벽의 노래」, 아픔을 누르며 눈물을 감추며 살아가는 삶을 담담히 묘사한 「가만가만, 노래」 등의 노래가 담겨 있다.

소설가인 한강의 노래는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의 제3부 「나무 불꽃」을 한창 쓰던 어느 날, 그는 꿈에서 어떤 음악이 들렸고, 아침에도 그 음감과 잔상이 선명해서 이것을 노래로 만들었다. “노래가 쏟아져 내려왔다”는 그는, 이때 20곡 가까이 노래를 썼고, 피아니스트 친구의 도움으로 음반까지 내게 됐다.

#서울예대에서 교직…“조급해 하지 마라”

그해 3월, 그는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전임교수로 임용돼 후학들에게 소설 창작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그의 말과 강의를 신뢰했다고 한다. 그가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이야기는 “너무 조급해 하지 마라”는 것. 왜 학생들에게 조급해 하지 말라고 했을까. 그는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좋은 욕심이긴 한데, 조급하면 힘이 드니까요. 좋은 작품으로 바로 등단하기보다는, 그런 작품을 서너 편 갖고 있을 때 등단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보다 재미있게 쓰는 게 좋은 거라고 얘기해줘요. 아이들에게 최대한 부정적인 얘기는 하지 않으려고 해요. 영향을 미치니까요.”(채널예스, 2011.12)

“식량 있어요?” 식사 시간을 놓친 그가 서울예대 행정실에 들어서면서 말했다. 순두부집에서 밥을 시켜서 시간을 놓친 이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소설이나 시를 쓰려는 학생들은 그를 자주 찾아왔다. 강의실에서 면담을 하기도 했고, 연구실에서 그들을 맞기도 했다. 그는‘눈물의 의자’에 앉아서 그들의 말을 공감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저 의자를 눈물의 의자라고 불렀어요.” 비가 많이 오던 어느 날, 그는 새롭게 소설 창작을 가르칠 정용준에게 연구실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정용준, 2022.1/2).

2009년 1월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남일당 건물에서 농성 중인 철거민들을 경찰이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6명이 숨지고 23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용산 참사’였다. 당시 철거민들과 전국철거민연합 회원들은 철거와 재개발 보상 문제와 관련해 남일당 건물에서 농성 중이었다. 경찰은 이날 새벽 특공대를 비롯해 대규모 경찰을 전격 투입해 해산에 나섰고, 이에 철거민과 전철연 회원들이 화염병과 투석기 등으로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사건이 발생했다.

비극적인 용산참사가 발생하면서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고, 사건의 책임소재를 둘러싸고 한동안 “공권력의 과잉 진입”이라는 주장과 “불법 과격시위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이라는 주장이 충돌했다. 하지만 나중에 국가인권위원회는 공권력이 과잉진압을 했음을 인정했고,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와 대한민국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역시 수사기관의 무리한 진압과 편파수사 등을 지적하면서 철거민과 유족 등에게 사과할 것을 공식적으로 권고했다.

“저거 광주잖아!” TV를 통해서 용산참사 속보를 지켜보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스스로 놀란 뒤 생각했다. 언젠가 광주가 일화로 들어 있는 소설을 쓸 거야!(정용준, 2022.1/2) 『소년이 온다』의 씨 하나가 뿌려진 순간이었다.

#슬럼프 끝에 탄생한 『바람이 분다, 가라』

하나의 장편소설이 빠져나간 뒤 새 장편이 심장으로 들어오기 전까지가 늘 위기였다. 새 장편을 맞이하기 위해서, 그는 부지런히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났다. 한 소설에서 다음 소설로 넘어가는 순간이 늘 힘들었다고, 한강은 고백했다.

“작품과 작품 사이가 힘들 때가 있다…. 쓰지 않을 때는 뭘 써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느껴지는 괴로움이 있다. 장편일 때는 빠져나간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질 수 있으니 많이 흔들릴 수가 있다.”(엄지혜, 2014.6)

어느 날, 우연히 한 의사로부터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사람을 위한 인공호흡기가 때로는 환자에게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른바 ‘호흡 충돌(breath fighting)’. 호흡 충돌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문득 숨과 숨이 싸우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나중에 말했다.

“숨을 쉴 수 없었던 사람이 인공호흡기가 넣어주는 바람에 의지하다가 갑자기 숨을 쉬게 되고, 그의 호흡이 인공호흡기의 숨과 싸우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거예요. 환자는 숨을 마시는데 인공호흡기는 공기를 빨아들이면 오히려 환자의 생명이 위태로워지니까 잘 살펴서 호흡기를 떼어줘야 한다는 건데,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숨과 싸우고 있는 어떤 사람이 떠올랐어요.”(정용준, 2022.1/2)

장편을 시작해 일 년 정도 쓰다가,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이때 서울 남재천에서 자전거를 타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생각했다. 정말 이제 못 쓰게 되었구나. 다시 못 볼 사람을 생각하는 것처럼 애틋한 생각도 들었다. 극심한 슬럼프였다고, 그는 『바람이 분다, 가라』의 「작가의 말」에서 적었다. 암시적으로.

“네 번의 겨울을 이 소설과 함께 보냈다. 바람과 얼음, 붉게 튼 주먹의 계절. 이 소설 때문에, 여름에도 몸 여기저기 살얼음이 박힌 느낌이었다. 때로 이 소설을 내려놓고 서성였던 시간, 뒤척였던 시간, 어떻게든 부숴야 할 것을 부수며 나아가려던 시간들을 이제는 돌아보지 말아야겠다.”(389쪽)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뜩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도 써봐야겠다. 무엇을 써야지 하고 쓰는 게 아니었다. 마지막 장면 정도만 생각하면서 써나갔다. 상념을 담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와 감정이 덧그려져 소설이 조금씩 만들어져 갔다(채널예스, 2010.6).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소설과 함께 살았다. 짧게는 1, 2년, 길게는 4, 5년. 소설과 함께 산다는 것은, 늘 소설과 인물을 생각하고, 마음으로라도 소설 이야기와 인물의 감정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었다. 소설과, 인물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가서 쓰려고 했다. 이는 자연히 소설을 삶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소설에 과격하게 기울어져 있지만, 오히려 균형 잡힌 상태라는 듯. 기울어진 중심이 잡혀서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듯. 그는 그렇게 소설을 살아서, 소설을 써나갔다.

“2년여 동안은 이 소설하고 살면 되니까, 그런 상태가 좋아요. 오히려 이 소설에서 다음 소설로 넘어가는 사이가 힘든 것 같아요. (스스로 의지하기보다,) 제 모든 걸 소설에 기울여, 늘 생각하고 있는 그런 상태가 좋아요. 그게 균형 잡힌 상태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 삶에 소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나는 이렇게 기울어져 있는 그런 상태.”(채널예스, 2011.12) 그것은 어쩌면 글쓰기 이외의 모든 일을 무나 무에 비슷하게 돌리는 일이기도 했다. “글을 쓸 때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움직이지 못한다. 걷지도 먹지도 못한다. 가장 수동적인 자세로, 글쓰기 외에 모든 것을 괄호 속에 넣고 한 단어씩 써간다. 그 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기억의 바깥」)

#“인간의 폭력성에도 살아내야 한다”

슬럼프를 가까스로 통과한 뒤, 일 년 반 동안 계간지 『문학과사회』에 소설 중반까지 연재했고, 그 후 다시 일 년 반쯤 고치며 다시 써나갔다. 예정보다 더디게 2010년 2월에야 네 번째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지성사)를 발표할 수 있었다. 책을 출간하고 나서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사람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채널예스, 2010.6)고, 그는 기억했다.

“두 번째로 주문한 커피가 식지 전에 나는 머그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가슴이 뜨겁게 덥혀갔다. 유리잔에 담긴 찬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물기 묻은 손을 주먹 쥐어보았다. 그러자 싸우기 위해 여기서 기다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이었다. 나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9쪽)

소설은 화가 인주의 의문스러운 죽음 이후 친구 정희가 인주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조사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결혼한 뒤 뱃속에서 세 아이를 잃었고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기도 했던 정희는, 자신의 친구이자 화가인 인주가 죽자 인주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평론가 석원은 인주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을 내림으로써 그녀의 죽음을 신화화하려고 한다. 친구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정희와, 이를 막으려는 석원. 결국 자신까지 죽음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음모에 맞서 정희는 끝까지 진실을,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빗발이 차창을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끈덕지게 와이퍼가 빗물을 닦아내는 소리가 들린다. 차체가 거세게 흔들린다. 나는 숨을 토한다. 쒜엑 쒜엑, 거친 숨이 허파를 찢으며 울린다. 두 눈을 흡뜬다. 고개를 비튼다. 빗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울부짖는 사이렌이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가 부풀어 오른 팔로 물속에서 파란 돌을 건져 올린다. 누군가가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간다.”(386-387쪽)

소설에는 중요한 현대 과학 이론인 ‘빅뱅 이론’을 비롯해 과학 내용이 자주, 적잖이 나오기도 한다. 이에 대한 한강의 설명이다.

“빅뱅 이론을 단순히 소도구로 보지 않았다. 소설의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과학 얘기들에 매료되었다. 인간이 모든 것의 처음과 끝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흥미로웠다. 내가 인간인 것에 대한 다행스러움, 경외감, 전율을 딛고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채널예스, 2010.6)

그는 언제 어떻게 빅뱅 이론을 비롯해 소설에 나오는 여러 과학 이론, 특히 현대 천체물리학에 대한 개념이나 지식을 쌓았던 것일까. 20대 후반 불교에 빠져 있던 그는 삼십대 후반에 한동안 천체물리학 책을 읽었다고, 나중에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십대 후반에는 불교에 깊이 빠져 있다가 나왔고, 삼십대 후반에는 한동안 천체물리학 책을 읽었어요.”(김연수, 2014.9)

그는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가 소설에서 가장 그리고 싶었던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자연과학 책을 읽으면서, 오랜 의문이었던 인간의 폭력성과 함께 앞서 말한 신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그 소설의 마지막에 주인공이 불 속을 기어 나오면서 깨끗한 공기 쪽으로 배를 밀고 가는 장면이 있는데, ‘살아내야 한다’는 대답을 그렇게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김연수, 2014.9)

안데르스 올손 노벨문학상 위원장은 “좀 더 서사에 기반한 책”이라며 “우정과 예술에 관한 크고 복잡한 소설로, 슬픔과 변화에 대한 갈망을 강렬하게 드러낸다”고 평가했다.

#『희랍어 시간』…“삶과 사람은 가장 연한 부문에서”

지금 글을 쓰기 어려운 상황인데, 좀 더 크게 생각해서 말을 잃은 사람에 대해 쓰면 어떨까? 결국 우리는 모두 다 세계를 잃어가는 사람 아닐까…. 빛을 잃어가는 사람과, 말을 잃어가는 사람. 그래, 두 사람의 이야기를 써보자…. 계속 살아야 하는 거라면, 그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전작 『바람이 분다, 가라』를 쓰는 동안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던 한강. 그는 지금까지 어떤 질문이 생겼을 때 그것을 글쓰기를 통해서 뚫고 나왔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말을 잃어가는 사람이 떠오르자 갑자기 여러 상상으로 뻗어나갔다. 맞다, 몇 년 전 희랍어 철학하는 분도 만났었지….(채널예스, 2011.12)

2011년 11월, 한강은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기척이 만나는 순간을 감동적으로 그린 장편 『희랍어 시간』(문학동네)을 발표했다. 소설은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와, 희랍어를 배우는 여자의 이야기다.

남자는 가족을 모두 독일에 두고 십 수 년 만에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치지만, 점점 눈이 멀고 있고 있으며 종래에 실명될 것을 알고 있다. 희랍어를 배우는 여자는 이혼 과정에서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기고 갑작스러운 실어증으로 말을 하지도 못하게 된 상태다.

“하지만 믿을 수 있겠니. 매일 밤 내가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는 걸.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 더듬더듬 커튼을 걷고, 유리창을 열고, 방충망 너머로 어두운 하늘을 봐야 하니까, 오직 상상 속에서 얇은 점퍼를 걸쳐 입고 문 밖으로 걸어 나갈 테니까. 캄캄한 보도블록들을 한 발 한 발 디디며 나아갈 테니까. 어둠의 피륙이 낱낱의 파르스름한 실이 되어 내 몸을, 이 도시를 휘감는 광경을 볼 테니까. 안경을 닦아 쓰고,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짧은 파란 빛에 얼굴을 담글 테니까. 믿을 수 있겠니. 그 생각만으로 나는 가슴이 떨려.”(83-84쪽)

그는 소설의 문장을 최대한 희랍어를 닮도록 노력했다.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게. 최대한 정확하게. 하고 싶은 말을 최대한 아끼고 꾹꾹 누르듯이. 함축적으로.

“최대한 정확하게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하려고 하는 말, 쓰려고 하는 분위기를 정확하게 옮기려고 하다 보니 행간을 띄우기도 하고, 이탤릭체로 기울이기도 했어요. 정황과 감정을 최대한 전달하려는 실험적인 시도였어요.”(채널예스, 2011.12)

소설이란 결국 질문하는 방식이라고 말한 한강이 이 작품에서 한 질문은 무엇일까. 과연 이번 소설을 통해서 답은 찾은 것일까.

“인간의 연한 부분에 대한 신뢰를 확인했다고 할까요. 두 인물이 구원 없는 세상을 살았잖아요. 서로 마주치는 순간, 소통할 때 자신의 가장 연한 부분을 꺼내잖아요. 손바닥에 글씨를 써준다든지, 서로 침묵하는 순간. 그런 것들이 인간 안에 있는 것이었는데, 그 연한 부분에서 삶을 시작되어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채널예스, 2011.12)

나보령 서울과학기술대 초빙교수는 리뷰에서 “타인의 취약성과 나의 취약성이 다를지라도,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눌 수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그와 같은 고통과 취약성이 역으로 불완전한 언어의 한계를 넘어 서로 다른 존재들을 결속시키는 장면들을 한강은 공들여 서사화한다.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시와 소설의 장르를 넘나드는 아름다운 언어적 실험 역시 주목할 만하다”(2023.6)고 평했다.

올손 노벨문학상위원회 위원장은 “취약한 두 개인 간의 특별한 관계를 매혹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라며 “이 책은 상실과 친밀감, 언어의 궁극적인 조건에 대한 아름다운 명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일련의 충격적인 경험으로 말의 힘을 잃은 한 젊은 여성이 시력을 잃어가는 고대 그리스어 선생님과 만나게 된다. 각자의 결함에서 비롯된 애틋한 사랑이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회복하는 인간」…“고통과 슬픔에서 등 돌리지 않겠다”

어느 날 뜸을 뜨다가 몸에 화상을 입었다. 화상 입은 자리를 한동안 방치해서 옅은 회색으로 조직이 상해 있었다. 한 달 남짓 치료를 해야 했다. 갑자기 다시 피부가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피가 흐르고 통증이 느껴졌다. 아, 회복이란 이런 것인가(김연수, 2014.9). 갑자기 가슴에서 불이 확 일었고, 그는 그 불을 확 잡아당겼다. 온 힘으로. 가슴에서 불이 다 꺼질 때까지.

2011년 봄, 그는 자신의 회복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단편 「회복하는 인간」을 『작가세계』 봄호에 발표했다. 언니의 죽음을 겪은 ‘당신’이 발목에 화상을 입고 그것이 아물어가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린 작품이다.

서른을 넘긴 방송 작가로 일하고 있는 ‘당신’은 일주일 전 언니를 잃는다. 당신은 언니의 장지에서 발목을 삐끗하고 다친 부위에 뜸을 뜨다가 화상을 입지만 한동안 방치한다. 같이 일하는 피디가 이를 보고서 작은 화상도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느냐며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병원을 가라고 조언한다. 당신은 치료를 받으면서 발목 화상에서 조금씩 회복해 간다.

“이 따위, 라고 중얼거리며 당신은 축축한 흙 위에 누워 있다. 회백색 구멍 속의 상처 따위는 이제 느껴지지 않는다. 흙이 들어간 오른쪽 눈이 쓰라리다. 이 모든 통각들이 너무 허약하다고, 당신은 수차례 두 눈을 깜박이며 생각한다.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제발 다시 이곳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게 해달라고, 당신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기도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린다.”(64-65쪽)

언니를 잃었던 ‘당신’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왜 자신이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일까. 그 이유를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처럼 들려준다.

“회복이라는 것에는 결별과 배반이 숨어 있다고 생각해요. 회복되기 전의 고통에서 벗어나야 가능한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이 회복되는 게, 회복되지 않은 채로 죽었고 이제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언니에 대한 결별이자 배반이라고 느껴요. 그런 의미에서, 영원히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마지막 기도는 죽은 언니와 함께하고자 하는, 자신의 과오와 고통과 슬픔에서 영원히 등을 돌리지 않고자 하는 기도이기도 해요. 그런데 그 기도가 역설적으로 회복을 향하는 기도가 돼요. 자신을 허물고 자신 밖으로 간절하게 빠져나가고자 하는 자의 기도라는 점에서요.”(김연수, 2014.9)

인간이 상처를 입거나 이 상처에서 회복하는 과정에서, 그러니까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인생에서 신은 없는 것일까. 한강의 이야기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을 믿어본 적이 없어요. 믿고 의지하려고 애써본 적도 있는데, 잘 안되었어요. 이십대 후반에는 불교에 깊이 빠져 있다가 나왔고, 삼십대 후반에는 한동안 천체물리학 책을 읽었어요. 신적인 것, 신성에 대한 생각은 지금도 가지고 있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저의 세계에 우리를 구원해줄 신은 없어요. 인간은 스스로 병들고 스스로 회복하는 존재라고 믿어요.”(김연수, 2014.9)

올슨 노벨문학상위원회 위원장은 「회복하는 인간」에 대해 “치유를 거부하는 다리 궤양과 주인공과 죽은 여동생 사이의 고통스러운 관계가 관련된다”며 “진정한 회복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으며, 고통은 일시적인 고통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근본적인 실존적 경험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노랑은 대낮의 태양”…『노랑무늬영원』

2012년 초, 그는 단편 「에우로파」를 『문예중앙』 봄호에 발표했다. 「에우로파」는 여성성이 가득한 남자 ‘나’의 이야기다. ‘나’는 대학 시절 만난 인아와 10년 넘게 친구로 지내 왔다. 인아를 사랑하기도 하는 나는, 밤이면 화장을 하고 인아와 함께 거리를 산책한다. 나의 속에 있는 여성성이 인아를 동경하지만, 또한 나의 남성성은 인아를 사랑하고 있다. 에우로파의 뜻은 목성의 ‘달’.

올슨 위원장은 「에우로파」에 대해 “여자로 가면을 쓴 남자 서술자가 불가능한 결혼 생활에서 헤어진 수수께끼의 여자에게 이끌린다.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면 당신의 인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을 때 내러티브 자아는 침묵을 지킨다. 여기에는 성취나 속죄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2012년 10월 단편 「회복하는 인간」과 「에우로파」를 비롯해 그 동안 쓰고 발표한 중단편을 묶은 세 번째 소설집 『노랑무늬영원』(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12년만의 소설집이었다. 소설집에는 표제작 「노랑무늬영원」과 「회복하는 인간」, 「에우로파」를 비롯해 「밝아지기 전에」, 「훈자」, 「파란 돌」,「왼손」 7편이 담겨 있다.

특히 표제작 「노랑무늬영원」은 수록 작품 가운데 가장 이른 『문학동네』 2003년 봄호에 발표한 작품이다. 주인공 ‘나’는 운전 도중 도로에 뛰어든 개를 피하려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후유증으로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없게 되면서 화가라는 직업도, 남편의 사랑도 잃을 처지에 놓인다. 우연히 친구 집에서 애들이 기르는 도마뱀을 보게 되는데, 사고로 잘려나간 도마뱀의 앞발에 작지만 새 발이 돋아나고 있었다. 언젠가 노랑색으로 작업을 하던 노화가의 말을 떠올린다.

“노랑은 태양입니다. 아침이나 어스름 저녁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태양이에요. 신비도 그윽함도 벗어던져버린, 가장 생생한 빛의 입자로 이뤄진, 가장 가벼운 덩어리입니다. 그것을 보려면 대낮 안에 있어야지요. 그것을 겪으려면. 그것을 견디려면. 그것으로 들어 올려 지려면…. 그것이, 되려면 말입니다.”(293쪽)(→제8화에 계속)

*참고문헌은 연재가 끝난 뒤 정리해서 한꺼번에 게시 예정입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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