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극장] 컴퓨터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러브레이스?

이창욱 기자 2024. 10. 2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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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 제공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컴퓨터의 초기 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거의 유일한 여성 과학자다. 러브레이스는 이 분야에서 '최초'로 무언가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무엇에서 최초를 기록한 것일까?

에이다 러브레이스. 과학동아 제공
의혹1. 최초의 컴퓨터를 만들었다. 과학동아 제공

막연하게 에이다 러브레이스를 최초로 컴퓨터를 발명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컴퓨터의 발명가, 이것은 진실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진실이 아니다.

러브레이스의 진짜 공헌을 알려면 찰스 배비지가 설계한 기계식 컴퓨터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배비지는 영국의 수학자이자 발명가였다. 배비지는 기계로 인간의 지적 작업을 대체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왔다.

오랜 연구 끝에 그는 수학의 함수값을 계산할 수 있는 기계를 설계했다. '차분기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기계는 곱셈이나 나눗셈 없이 덧셈과 뺄셈으로 함수의 값을 계산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지원을 받아 배비지는 차분기계 제작에 착수했으나 예산 부족으로 완성을 보지 못했다.

차분기관보다 개념적으로 진일보한 것이 바로 '해석기관'이었다. 차분기관이 수준 높은 계산기라면 해석기관은 이를 한 차원 뛰어넘었다. 해석기관에는 구멍을 낸 천공카드를 삽입하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저장, 입력할 수 있었으며 반복적인 데이터 처리도 가능했다.

해석기관은 오늘날의 전자식 컴퓨터와는 분명 다른 기계식 컴퓨터이지만 데이터 입력 및 반복 처리와 같은 데이터 처리 특성으로 인해 인류 최초의 컴퓨터로 평가받는다. 결국 최초의 컴퓨터 발명가는 러브레이스가 아닌 배비지인 것이다.

러브레이스는 배비지의 해석기관에서 사용할 첫 프로그램을 만든 최초의 프로그래머였다. 놀라운 점은 그 시점이 해석기관이 만들어지기 이전이라는 것이다. 설계도만 있는 기계를 머릿속에 그려가며 소프트웨어를 만든 셈이다. 지인을 통해 배비지를 소개받은 러브레이스는 가끔씩 배비지의 조언을 들으며 스스로 해석기관의 작동 원리를 익혔다. 

당시 배비지와 동료들은 루이기 메나브레아라는 사람이 프랑스어로 발표한 배비지의 강연 요약을 영어로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이 일의 적임자로 러브레이스를 꼽았다. 일을 맡기면서 배비지는 러브레이스에게 전문성을 발휘해 차분기관과 해석기관의 차이를 더 써보라고 권했다. 그렇게 해서 번역된 글에는 원문보다 세 배나 긴 7개의 주석이 더해졌다.

그 결과 러브레이스는 1843년 발표한 '배비지가 발명한 해석기관에 관한 소개'에서 해석기관이 계산을 넘어 여러 지적 작업, 예를 들어 음악도 작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초의 프로그램이 제시된 것은 이 글의 '주석 G'다. 여기서 러브레이스는 확률론이나 통계학에서 쓰이는 '베르누이의 수열'을 계산하는 알고리즘을 제시했다. 

러브레이스는 루프문, 조건문, 서브루틴 등의 개념을 도입해 해석기관으로 베르누이의 수열을 구하는 작업의 순서도를 만들어냈다. 오늘날 코딩의 기본 개념을 확립한 것이다.

(왼쪽부터) 찰스 배비지가 설계한 해석기관의 일부를 모형으로 재현했다. 해석기관은 최초의 범용 기계식 계산기로 증기기관을 통해 작동할 예정이었으나 배비지가 죽을 때까지 만들어지지 못했다, 에이다 러브레이스가 번역하고 가필한 '배비지가 발명한 해석기관에 관한 소개'의 '주석 G'. 러브레이스는 해석기관을 통해 베르누이의 수열을 계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최초로 만들어 주석으로 공개했다. Public Domain 제공
의혹2. 아버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 과학동아 제공

에이다 러브레이스를 포함한 근대 이전의 여성 과학자들에게는 본인의 역량 이외에도 주변의 도움이 중요했다. 교육과 연구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 속에서 그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러브레이스에게도 그런 조력자가 있었을까?

러브레이스의 아버지는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영국의 시인 조지 바이런이다. 바이런은 러브레이스보다도 더 유명한데 뛰어난 낭만주의 시인으로 영문학계에 그 이름을 남겼다. 당대의 지식인 바이런이라면 딸의 재능을 진작부터 알아보고 밀어주지 않았을까.

진실을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못했다. 바이런의 바람기로 러브레이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부 사이는 최악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러브레이스가 딸로 태어나자 바이런은 작위를 물려줄 수 없다며 실망을 감추지 않았고 러브레이스가 생후 3개월이 됐을 때 정식으로 이혼했다. 이후 바이런은 영국을 떠났고 러브레이스가 8살이었던 1824년 바이런은 그리스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런 상황에서 러브레이스를 키워낸 것은 어머니였던 앤 이사벨라 밀뱅크 여남작이었다. 어머니 밀뱅크는 이과생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바이런이 밀뱅크를 두고 '평행사변형의 공주'라고 놀릴 정도였다. 그는 러브레이스에게 기하학, 천문학, 대수학을 공부하게 했고 딸을 이끌고 과학자들의 강연을 들으러 갔다.

딸이 아버지를 닮을까 우려한 어머니가 일부러 이공계 공부를 시켰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보다는 과학을 좋아했던 밀뱅크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딸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러브레이스의 이웃이었던 메리 서머빌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서머빌은 '물리과학의 관계'라는 19세기 최고의 과학 베스트셀러를 낸 여성 과학자였다. 인쇄소 조판공이었던 마이클 패러데이가 이 책을 보고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일화도 있다. 

러브레이스는 궁금한 것을 종종 서머빌에게 물어보면서 자신의 과학 지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러브레이스에게 배비지를 소개해 준 것도 서머빌이었다. 러브레이스는 아버지의 지원은 없었지만 밀뱅크와 서머빌의 적극적인 도움을 통해 과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의혹3.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비록 경마 도박에 빠져 큰 돈을 잃고 불우한 말년을 보냈지만 컴퓨터의 가능성과 미래를 내다본 선구적 연구자였다. 과학동아 제공

러브레이스는 1852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말년은 평탄치 않았다. 자궁암에 걸려 당시 유행에 따라 아편을 치료제로 썼지만 병만 더 악화됐다. 거기에 죽기 몇년 전에는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천재 여성 과학자는 정말 도박 중독으로 고생했을까?

러브레이스는 1835년 윌리엄 킹과 결혼해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며 화목한 관계를 유지했다. 1838년 킹은 백작에 서훈됐는데 부부는 새로운 백작가의 이름을 에이다의 선조의 이름을 따서 러브레이스로 지을 정도로 둘 사이의 관계는 좋았다.

아내만큼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남편도 영국의 권위있는 과학학회 회원으로 뽑힐 정도로 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지적으로 교류가 가능한 남편과 세 명의 자녀들, 러브레이스가 도박 중독에 빠질 이유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러브레이스가 도박에 빠져 재산을 잃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도박에 빠지게 된 이면에는 자신의 수학 실력에 대한 과신이 있었다. 러브레이스는 확률 계산을 통해 경마의 승부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던 것이다.

러브레이스는 자신의 돈뿐만 아니라 친구들의 돈까지 끌어모아 경마에 걸었다. 배비지의 해석기관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돈을 모으기 위해 도박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목적이 무엇이든 그는 큰 돈을 잃고 빚까지 졌다.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남편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다. 여기에 불륜 스캔들까지 퍼지면서 그들의 부부 사이는 파국에 이르렀다. 이런 상태에서 자궁암을 앓던 러브레이스는 결국 아버지 바이런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와 같은 36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초상화로만 봤던 아버지였지만 바이런에 대한 동경을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아왔던 러브레이스는 아버지의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에 따라 그는 아버지 바이런의 관 옆에 안장됐다. 길지 않은 삶이었지만 러브레이스가 이후의 컴퓨터 과학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러브레이스는 남녀 통틀어 역사상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였으며 그의 프로그램은 해석기관의 고차원적 응용 가능성을 보여주는 실례였다. 즉 러브레이스는 프로그래머인 동시에 컴퓨터의 가능성과 미래를 한세기 앞서 전망했던 예언가이기도 했다.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이자 예언가의 자취는 1980년 미국 국방부가 개발한 프로그래밍 언어에 붙은 '에이다'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컴퓨터 과학계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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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 10월호, [과학사극장] 컴퓨터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러브레이스다?

[이창욱 기자 changwoo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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