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시월이 가고 있다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 한 탓이라.”
가을비 쏟아진 후 기온이 급강하한 상강(霜降), 황동규 시인의 ‘시월(十月)’을 읽었습니다. 빗방울이 떨어지며 대기를 싸늘하게 식히는 소리에 골몰하게 될 정도로, 잊고 싶은데 차마 떨쳐내지 못하는 약속이란 무엇일까요? 찬 바람 불 때면 으레 기억 속 깊은 곳에서 떠오르곤 하는 회한 서린 어떤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시월은 서글퍼서 더 아름다운 계절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읊습니다.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석양이 짙어 가는 푸른 모래톱/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旅程)들을,/아득한 기대를/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두견이 우는 숲새를 건너서/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울리던 목금(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강물도, 석양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월이 가고 있습니다. 비바람 한 번 더 불면 낙엽이 지겠지요. 가을은 모든 생명력 지닌 것들이 낙하하는 계절. “누이야 무엇하나/달이 지는데/밀물지는 고물에서/눈을 감듯이//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고 시인이 노래한 이유겠죠.
나뭇가지를 흔든 바람이 여윈 손가락을 뻗어 사정없이 옷깃을 파고드는 해 질 녘이면, 밝고 따뜻한 것에 대한 갈망이 불거질 겁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창 밖에 가득한 낙엽이 내리는 저녁/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 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시월의 마지막 주말, 따스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곽아람 Books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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