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노보다 선비 춤꾼이 멋지더라...'스테이지 파이터'의 발견

유주현 2024. 10. 26.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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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지 파이터’에서 한국무용만의 아우라를 과시하고 있는 국립무용단 수석무용수 출신 최호종. [사진 CJENM]
TV에 다시 춤바람이 분다. 화제의 춤 서바이벌 ‘스테이지 파이터(스테파)’ 얘기다. 지난 9월말 첫 방송 이후 각종 시청률 조사에서 파죽지세를 이어가고 있다. 10월 2주차 비드라마 부문 화제성 1위, 1539 타겟 시청률 지상파 포함 동시간대 1위, 2049 남녀 시청률 종편+유료 동시간대 1위, 전체 디지털 콘텐츠 조회수 1억3500만 뷰 달성 등이다.

‘스테파’는 최근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2020), ‘스트릿 맨 파이터(스맨파)’(2022)로 이어진 Mnet 춤 서바이벌의 계보를 잇고 있지만, 대중예술로 분류되는 스트릿 댄스나 K팝 댄스와 달리 순수무용이라 차별화된다. 장르 제한 없는 ‘댄싱9’(2014)도 있었지만, ‘스테파’는 발레와 현대무용·한국무용이 엄격한 장르구분으로 시작해 경계를 허물어가는 전혀 새로운 형태다.

그런데 그 모든 춤 서바이벌 중 가장 매운 맛이다. 팀 대결이 아니라 무용수 개개인이 커다란 하나의 컴퍼니 조직을 향해 달려가며 무한 계급전쟁을 벌이는 구도인데다, 장르간 자존심 싸움도 있다. 매 미션마다 주역과 조역, 군무 계급을 나눠 승급과 강등을 가리고, 각 계급 안에서도 세분화된 메인과 서브 자리를 쟁취하려 경쟁이 이어진다. 최종적으로 각 계급의 베스트 멤버들로 하나의 글로벌 K댄스 공연팀이 탄생된다.
Mnet '스테이지 파이터' [사진 CJENM]

3장르 64명의 남자 무용수들이 모였지만, 초반 피지컬과 테크닉 기본기를 볼 때는 장르별로 실시되던 오디션이 점차 벽을 허물며 예술성과 창의력이 부각된다. 이번주 방송에서 첫 장르 초월 미션인 64명 모두 한 무대에 서는 ‘메가 스테이지’ 캐스팅 오디션을 벌였는데, 현대무용가 최수진이 안무한 ‘위혼무’ 주역에 한국무용수 2명(최호종·김효준)과 발레리노 1명(김유찬)이 낙점됐다. 계급별 오디션에서 군무 계급은 어떤 장르가 가장 매력적인 안무를 짰는지 가렸고, 조역 계급은 장르가 다른 2명씩 맞붙어 필살기 카피 배틀로 승부했다. 주역 계급은 센터에서 얼마나 돋보이는 춤선을 과시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장르가 섞이니 각 장르의 장단점과 각기 다른 매력이 도드라지고, 결국 장르를 넘어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무용수가 자연스럽게 돋보이게 된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스테이지 파이터'의 최호종. [사진 CJENM]

‘스테파’의 미덕은 가장 대중화가 힘든 예술장르인 무용의 친근감을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순수무용을 피겨스케이팅이나 리듬체조같은 미적인 스포츠처럼 전문용어 해설과 함께 테크닉 대결 앵글을 취하니 흥미가 배가됐다. 예술에서 테크닉은 일부일 뿐이지만, 문턱을 낮추고 접근성을 높이는 데 성공한 것은 틀림없다.
무엇보다 한국무용의 재발견이 괄목할 만하다. 기시감이 있는 발레나 현대무용과 달리 도포자락 휘날리는 수려한 외모의 선비 춤꾼들이 ‘자반’ ‘선자’ 등 발레 점프 못잖게 역동적인 기술로 구현하는 멋진 장면들은 편견을 거부한다. 풀어헤친 도포자락 사이로 반쯤 가려진 선비들의 고운 자태는 몸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발레리노의 레오타드나 현대무용수의 ‘상탈’보다 수가 높다. 자로 잰 듯한 각도 대신 여유롭게 흐트러지는 춤사위도 훌쩍 멋스럽다. 댄스필름 미션에서 한국무용 ‘왕의 기원: 태평성대’는 K팝 음원에 맞춘 안무 탓에 K팝 뮤직비디오와 유사해져 버렸지만, 유튜브 인기급상승동영상 9위에 오르는 등 가장 핫했다.
'스테이지 파이터'에서 주목받고 있는 한국무용수 김종철, 기무간, 최호종.(왼쪽부터) [사진 CJENM]

사실 한국무용이 대중매체에 노출되는 일은 잘 없었다. 발레와 현대무용은 ‘댄싱9’이나 ‘백조클럽’(2017) 등 예능을 통해 꽤 주목받았다. 발레는 취미 인구도 꽤 되고 주요 단체의 대형 공연은 거의 매진사례다. 현대무용도 ‘범 내려온다’ 이후 부쩍 친숙해졌다. 한국무용만 소수 전문가의 영역에 머물러 왔다. 전통춤만 떠올리던 한국무용에도 스펙터클한 고난도 테크닉이 있고, 한국적 호흡이 실린 춤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스테파’가 마침내 대중에게 보여준 것이다.

‘남자 무용수들의 우아하고 잔혹한 계급 전쟁’이란 부제처럼 매회 되풀이되는 계급 쟁탈전이 무한 경쟁 사회의 축약판처럼 보여 씁쓸하다는 반응도 있다. 하지만 국립단체 주역무용수부터 비전공자까지 계급장 떼고 시작했고, 미션마다 격렬한 계급 이동이 진행되며 진정한 실력자를 가린다는 점에서 꽤 공정한 게임의 룰이 적용되고 있다. 애초에 경쟁이란 직업 무용수의 삶 자체이기도 하다.

1등만 살아남는 구도도 아니다. 주역과 솔리스트, 군무진을 갖춘 하나의 댄스 컴퍼니를 조직해 공연을 올리는 목표인 만큼, 주역 계급이 탈락하고 군무 계급이 생존하는 경우도 생긴다. 무용 공연에선 군무가 생명이다. 제아무리 주역의 개인기가 뛰어나도 군무의 스펙터클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1시간짜리 무대를 채울 수 없다. 드라마 ‘정년이’의 여성국극에서 대사 한마디 없는 ‘촛대’들이 필수적인 것과 비슷하다.

다만 3장르를 섞어 만든다는 작품의 완성도는 자못 궁금하다. 각 장르 무용수들이 같은 춤을 추고자 무리하다 부상까지 당하는 오디션 방식도 의문이다. 각자의 매력과 전문성이 희석되고 서로 쉽게 섞일 수 있는 지점을 향해 가다 순수무용의 고유한 아우라가 사라진 ‘장편 K팝 댄스’가 탄생한다면 이 서바이벌은 헛수고다. 무용의 품격은 8할이 음악에 달렸다. 제작진이 어떤 음악을 제시할지 지켜볼 일이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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