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공명하는 한강 ‘퍼포먼스 아트’…그래서 더 큰 울림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2024. 10. 26.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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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미술과 함께한 한강 작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은 미술 창작도 해왔다. 사진은 소설 『흰』과 관련된 한강의 퍼포먼스 영상 ‘걸음’. [사진 한강 영문 홈페이지]
소설 『흰』과 관련된 한강의 퍼포먼스 영상 ‘걸음’. 작가는 손으로 펜을 쥐는 대신 발로 목탄을 쥐고 종이를 따라 걸으며 흔들리고 뭉개지면서도 크게 이어지는 선을 그어 나간다. 마치 글쓰기의 과정과도 같다. [사진 한강 영문 홈페이지]
15분 남짓한 침묵의 영상. 검은 옷의 한강 작가가 흰 천을 잘라 바느질한다. 완성된 것은 작디작은 배내옷. 하지만 옷을 입을 갓난아기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작가가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했고 어머니에게서 그 “까만 눈동자”에 대해 듣기만 하던 언니를 위한 옷이기 때문이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그의 문학 작품은 물론 미술·음악 등 타 장르 예술 창작도 재조명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인 퍼포먼스 영상 작품 ‘배내옷’(2016) 이야기다.

한강 작가는 ‘배내옷’을 비롯해 ‘돌. 소금. 얼음’ ‘걸음’ ‘밀봉’ 등 4개의 퍼포먼스 영상 작품(영상 제작 최진혁)을 2016년 6월 서울 전시에서 선보였다. 전시 직전에 출간한 “가장 자전적인 소설” 『흰』과 관련된 작품들이었고, 책에 삽입된 사진들을 촬영한 미술가 차미혜와의 2인전이었다.

“언어·침묵 그 언저리에 고인 것 표현”
소설 『흰』과 관련된 한강의 퍼포먼스 영상 ‘배내옷’.[사진 차진혁]
『흰』은 세상의 ‘흰 것들’에 대한 65개의 짤막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작가의 말대로 “산문시이기도 하고 소설이기도 하고 에세이이기도 하다.” 여러 대담에서 밝힌 대로 작가는 “흰 것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 수의” 같은 것들을 나열하다 보니 “모두 인간의 근원적인 것들과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근원은 죽은 언니, 만약 무사히 자랐다면 자신은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고 느끼는 언니와 관련 있다는 생각이 들어 『흰』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의 세 번째 이야기 ‘배내옷’을 읽으면 고요한 퍼포먼스 영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작한다. “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이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외딴 시골집에서 예기치 않게 조산을 하게 되어 남편도 이웃도 부재 중인 상황에서 엉금엉금 기며 혼자 출산 준비를 하고 배내옷을 만들었다. “산통을 참으며, 무서워서 눈물이 떨어지는 대로 바느질을 했다.”

또한 퍼포먼스 영상을 보면 소설의 산문시 같은 구절들을 더 증폭되는 감정으로 읽을 수 있다.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다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 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 제발 죽지 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배내옷’) 뒤늦게 귀가한 아버지는 아기를 산에 묻었다. “아기의 배내옷이 수의가 되었다. 강보가 관이 되었다.”(‘수의’)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작가의 말’)

석사 논문은 ‘이상의 회화와 문학세계’
소설 『흰』과 관련된 한강의 퍼포먼스 영상 ‘돌. 소금. 얼음’. [사진 한강 영문 홈페이지]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와 글은 서로가 없어도 각각의 자체적인 울림이 있다. 하지만 그 둘이 함께 하면 울림은 더욱 깊고 커진다. 작가는 퍼포먼스에 대해 “‘흰’을 가로지르려면 말의 죽음을 통과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며 “언어도 아니고 침묵도 아닌 것. 그것들 사이에, 아니면 그 언저리에, 어둑한 밑면에 고이거나 흔들리거나 부스러지는 것”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 일환으로 퍼포먼스 영상 작품 ‘걸음’에서는 손으로 펜을 쥐는 대신 발로 목탄을 움켜쥔 채 흰 종이를 걸으며 선을 그어 나간다.

글과 서로를 보완하거나 공명하는 한강의 미술 창작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2018년에는 북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국제미술전 ‘카네기 인터내셔널’에 미술가 임흥순과 함께 초청 받았다. 영상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를 미국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서 선보였다. 두 개의 디스플레이에 펼쳐진 18분 남짓한 영상에는 두 여성이 커다란 흰 천을 돛처럼 들고 눈 덮인 숲과 해변을 따라 걷는 퍼포먼스가 담겨 있다. 3년이 흐른 2021년 작가는 제주 4·3을 다룬 소설을 동명의 제목으로 발표했다.

한강의 설치미술 작품 ‘장례식’. 영상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와 함께 2018년 미국 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에 전시된 모습이다. '3년 후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 가 출간된다. [사진 한강 영문 홈페이지]
흥미로운 것은 한강이 자신처럼 문학과 미술을 넘나든 선배 거장에 대해 논문을 썼다는 것이다.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학부를 졸업한 그는 소설가로 활발히 활동하던 중인 2012년 동 대학원을 졸업하며 석사 논문으로 ‘이상(李箱)의 회화와 문학세계’를 발표했다. 일찍이 건축가였던 아방가르드 시인·소설가 이상은 회화 작품도 남겼는데, 한강은 그중 초기 유화 자화상 두 점과 이상의 시에 담긴 자의식의 공통성, 이상이 단편소설 『날개』를 위해 직접 그린 삽화 두 점과 소설의 구조적 유사성, 이상의 말년 드로잉 자화상들과 그의 문학의 기법적 상동성을 탐구한다.

특히 “(자화상에서) 선의 뚜렷한 재현성 대신 유동하는 점들로 형상을 만들고, 그 형상이 더욱 모호해지도록 형상 위로 수많은 점들을 덧찍은 이상의 시도는 (여러 분열적 목소리로 말하는 듯한 그의 문학작품의) 이 창작 메커니즘의 시각적 표상”이라는 탐구가 인상적이다.

“동일한 창작자가 창작한 회화와 문학 작품은 창작 원리와 모티프에 있어 공유점을 갖는다”는 논문의 말은 한강 자신의 작품세계에도 해당한다.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도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시는 그림과 같다)”라고 했고, 북송 시인 소동파 또한 ‘시화일률(詩畵一律)’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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