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직업도 버렸다, 무장독립투쟁 이끈 광복회 총사령관

2024. 10. 26.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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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⑩ 고헌 박상진
다시 태어나기 힘든 이 세상에
다행히 대장부로 태어났건만
이룬 일 하나 없이 저 세상에 가려하니
청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찡그리네
(순국 당일 지은 박상진 선생 유시 중)

고헌(固軒) 박상진(朴尙鎭)은 1885년 울산 송정에서 박시규의 장남으로 태어나 생후 100일 만에 큰아버지 박시룡의 양자로 들어가 경주 녹동에서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생부는 승지를 지냈고 양부는 홍문관 교리를 지낸 명문가다. 어린 시절 구걸하러 온 이에게 좋은 곡식을 주게 하고 떨어진 옷을 입은 아이에게 서슴없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15세 때 경주 마지막 최 부자 최준의 사촌 영백과 결혼했다. 이후 청송 진보로 가서 수학하던 중 왕산 허위를 만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혁신유림의 길을 걷게 된다. 허위는 의정부참찬으로 있으면서 한일의정서에 반대하고 일제침략을 규탄하면서 의병봉기에 나선 인물로 형제들이 모두 항일투쟁에 참여했고 이육사 외조부와는 사촌간이다.

1899년 허위가 벼슬길에 올라 상경한 후 박상진도 1902년 상경해 스승을 다시 만나 수학하던 중 1904년 고향으로 내려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노비해방과 적서차별철폐를 실천한다. 1905년 스승의 권유로 양정의숙 전문부에 입학해 법률, 경제 등을 공부한다. 이 시절 백산 안희제 등 동지들을 만나게 되며 의병장 신돌석, 홍성 출신 김좌진과는 의형제를 맺고 주한 외교관, 선교사들과도 교류하면서 견문을 넓혀나갔다.

스승 허위는 의병부대 13도 창의군 군사장
독립운동가 박상진 선생. 광복회 총사령관을 역임,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중앙포토]
1908년 양정의숙을 1회로 졸업하고 애국계몽운동에 나서 영남지역 교육진흥을 위해 조직된 ‘교남교육회’와 대구지역 ‘달성친목회’에 참여해 활동했다. 이 시기 ‘신민회’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해에 스승 허위는 13도 창의군 군사장으로 의병부대를 이끌고 한성부로 진격해 동대문 인근(지금의 왕산로)까지 이르러 혈전을 벌였으나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제1호 사형수로 순국했다. 스승의 의병활동을 도왔던 제자 박상진은 시신을 수습해 상주 역할을 했다.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으로 발령이 났으나 안중근 의사의 재판을 보고 부임을 거부하고 사직한다. 경술국치 후 만주로 건너가 김대락, 이상룡, 김동삼 등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독립투쟁방략을 논의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해선 무장독립투쟁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만주에서 귀국 후 동지들을 규합해 무장독립투쟁을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단둥과 신의주에 독립운동연락기관으로 ‘안동여관’을 개설했다. 1912년에는 김덕기, 오혁태와 합자해 대구 약령시 부근에 곡물무역상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했다. 안동여관, 상덕태상회와 국내 곳곳에 세워진 상회는 독립운동자금지원과 만주와 국내를 연결하는 비밀연락거점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 조직은 후일 광복회 지원 조직이 된다.

구한말 구국운동은 무장투쟁노선의 의병운동과 국민의 힘을 길러 일제에 대항하려는 애국계몽운동으로 전개됐으나 경술국치 후 일제의 무단통치로 한계에 직면한다. 이후 1910년대 독립운동은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이념과 논리가 독립전쟁론으로 통합, 발전되어 전개된다. 1915년 대구에서 의병계열의 독립의군부·풍기광복단, 계몽운동계열의 달성친목회·조선국권회복단 인사들과 각 지역 인사들이 합류해 전국적인 통합 비밀결사단체인 ‘(대한)광복회’를 조직했고 박상진이 그 중심에 서게 된다.

울산 문화공원에 있는 박상진 선생 동상. [사진 울산시]
광복회의 목적은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제정세를 보아가며 적시에 일제와의 전쟁을 통해 민족해방과 조국독립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한인들의 집단적인 국외이주계획도 추진하고자 했다. 광복회는 한말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통합한 독립전쟁론이라는 새로운 항일독립운동의 지평을 열었고 무력준비, 무관양성, 군인양성, 무기구입 등을 투쟁 강령으로 한 무장투쟁노선을 분명히 했다.

광복회 본부조직은 총사령 박상진과 부사령 이진룡(후에 김좌진), 지휘장 우재룡·권영만으로 구성되었고 8도에 지부를 두고 각처에 곡물상과 잡화상 등을 세워 군자금 모금과 비밀연락기관 역할을 하게 했다. 국외거점으로 북만주지역에 ‘지린(吉林)광복회’를 조직했고 남만주지역 서간도의 부민단, 신흥학교 등과도 긴밀히 연계해 활동하면서 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최대 독립군조직으로 성장했다.

광복회 회원들은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재산을 내어놓은 것은 물론, 무장활동 등 다양한 군자금모금 방법을 강구했다. 광복회 출범 후 1915년부터 ‘경북우편마차탈취사건’ ‘운산금광현금수송마차습격사건’과 일본인 소유 광산을 공격한 ‘영월중석광사건’ 등이 있었다. 또 한편 전국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재산이나 일제와의 협력 등을 감안해 할당액을 정하고 포고문을 보내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각출하도록 했다. 광복회 모금에 저항하거나 일제에 밀고하는 악질적 인물은 응징하는 의협투쟁도 했다. 독립자금을 거절하고 일제에 밀고한 칠곡부호 장승원 처단도 이때 사건이다. 대구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과정에서는 ‘대구권총사건’이 일어나 관련자들이 체포됐으며 박상진도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이외에도 화폐를 위조해 군자금을 조달하려는 시도도 수차례 했다.

일제가 광복회를 주목하고 수사하던 중 1918년 초 군자금 모금을 거부한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 처단사건의 주역인 광복회원 장두환이 체포되자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되었고 광복회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일제는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한 관계자 61명의 명단을 파악해 전국 각지에서 체포하고 재판에 회부해 사형 등을 선고했다. 이 사건으로 광복회 지도부가 대부분 체포되어 조직이 사실상 와해됐으나 체포되지 않은 회원들을 중심으로 ‘주비단’ ‘광복단결사대’ 등 후속단체가 조직되어 1920년대 국내 비밀결사운동으로 이어졌다.

대구서 곡물무역상 상덕태상회 설립
선생이 순국한 뒤 그의 부인은 가난에 시달렸다. 그녀의 비참한 생활이 실린 1961년 3월 5일자 부산일보. [사진 부산일보]
우재룡·권영만은 만주로 탈출했고 주괴로 지목된 박상진은 안동으로 피신해 은신하면서 만주로 망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경주에 있는 생모가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녹동 집으로 향했다. 모친의 출상 하루 전 도착한 박상진은 대거 출동해 대기 중이던 일제 경찰에 상복을 입은 채로 체포되었다. 공주지방법원, 복심법원, 고등법원을 거쳐 3년 이상 진행 된 재판과정에서 생부 박시규의 처절한 구명활동에도 불구하고 사형이 확정됐다. 만주로 망명한 부사령 김좌진이 그를 구하기 위한 파옥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4년간 옥고를 치르던 선생은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 대구감옥에서 빼앗긴 강토를 찾지 못했음을 한탄하는 한 편의 시를 남기고 37세의 나이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형 집행을 통보받은 생부 박시규가 유해를 거두어 경주로 운구해 안장했다. 장사 지내던 날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남모르는 길을 가던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모두들 “죽었어도 오히려 영광이다”라고 하였다’.(박상진 제문 번역본)

박상진 순국 후 일곱 집안 1백여 식구는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게 되었다 한다. 부인은 사촌동생 최준과 재산분쟁 끝에 가난과 고독 속에서 신음하다 부산에서 생을 마감했고 그녀의 비참한 생활은 부산일보(1961년 3월 5일자)에 보도되기도 했다.

명문가에 태어나 가문, 재산, 재능 등 어느 하나 남부러울 것 없었던 선생은 모든 것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해 노블레스오블리주를 실천했다. 그가 이끈 대한광복회는 일제치하의 암울했던 시기에 의열독립투쟁의 횃불이었고 한민족에게는 희망의 빛이 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울산 송정동 생가는 울산광역시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울산 문화공원에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현재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석동의 한민족 DNA를 찾아서』가 있으며, 오랜 경제전문가로서 직장인들의 팍팍한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가성비 좋은 서울의 노포 맛집을 소개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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