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카와 아야의 시사일본어] 화이트 안건
지난 8월 이후 수도권에서 발생한 9건의 야미바이토 관련 사건으로 29명이 체포됐다. 하지만 모두 하수인들로 범죄를 지시한 주범은 잡지 못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요코하마에서 발생한 강도살인 사건의 용의자는 단기간에 돈을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다가 그것이 야미바이토인 줄 모르고 SNS를 통한 모집에 응했다고 한다. 모집 광고에는 ‘화이트 안건’이라고 명시돼 있었고, 그 일이 범죄라는 것을 알았을 땐 이미 자신의 개인정보를 제공한 뒤였기에 무서워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남성 피해자를 폭행하고 살해한 사건인데 약 30만 엔(약 276만원) 상당의 금품을 빼앗은 것으로 알려졌다. 살해하고 빼앗은 금액이 단돈 30만 엔에 불과한 것을 보면, 일을 거절할 경우 입막음을 위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받았을 수 있다. 22세의 용의자는 몇십만 엔의 세금을 못 내 고액 아르바이트를 찾았다고 한다. 뒤늦게 후회를 했으나 숨진 피해자를 되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문득 한국영화 ‘소리도 없이’가 생각났다. 영화의 오프닝 장면에서 평화롭게 계란을 팔던 남자 둘이 범죄 조직의 하청을 받아 사체 처리도 하는데, 계란을 팔 때나 사체 처리를 할 때나 한결같이 태연한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그들에게는 계란 판매나 사체 처리나 둘 다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이런 범죄 대행 아르바이트가 정말 있을까 싶었는데 지금 일본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영화의 주인공처럼 죄의식 없이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화이트 안건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범죄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을 보면 그들도 일종의 사기 피해자인 셈이다. 사람을 모집할 때는 화이트 안건처럼 가장해 짐을 옮기는 것뿐이라고 말하고, 막상 현장에선 강도 범죄에 가담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는 화이트 안건이라는 사전 설명도 믿을 수 없게 됐다. 어떻게 안전한 아르바이트를 찾을 수 있을까. 막막할 뿐이다.
나리카와 아야 전 아사히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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