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사랑

2024. 10. 25.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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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면 내가 붙들고 가는 몇 개의 경구가 있다.

나는 먹먹함에 고개만 끄덕일 뿐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차분하고 신비롭게, 그 이야기의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났다.

사랑과 끌어안았던 그 이야기에 힘입어 나는 오랜 의심을 걷고 감히 사랑을 확신하길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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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취 풍기던 어린 시절 나
캐나다인은 따뜻하게 맞아
국가가 사랑하든 안 하든
난 국가를 사랑할 수밖에"
난민 출신 작가의 말 감동
의심 없는 사랑 확산되길

글을 쓸 때면 내가 붙들고 가는 몇 개의 경구가 있다. 그중 하나는 미국 예술가 제니 홀저가 '트루이즘'에 쓴 구절이다. "추호도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정신의 크기를 증명한다." 나는 이 문구를 표본 삼아 내 삶과 글이 여기에 얼마나 걸맞은지 살핀다. 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 본의 아니게 더 많은 죄인을 만들어내듯 나에게 이 지침은 의문과 반발을 낳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사랑을 의심해보는 태도가 어떤 경우엔 사랑의 나쁜 환상을 깨뜨려주지 않나? 나는 못 미더운 게임 파트너를 대하듯 '사랑'의 얼굴을 흘깃거리며 미심쩍어한다.

최근 읽은 단편소설 '판사님'에는 어느 캐나다 작가의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는 국가의 공식 사절단이 되어 말레이시아에 방문한다. 연회장에서 작가의 곁에 앉은 말레이시아 대법원장이 조금은 집요한 태도로 당신이 사절단에서 맡은 역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작가는 자기에게 부여된 삶의 조건들을 하나씩 꼽는다. '여자, 문화예술계 종사자, 소수 인종, 캐나다에서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 그리고 아주 작은 키.' 그다음 간결하고 담백하게 선언한다. 바로 자신이 "캐나다의 얼굴"이라고.

나는 소설의 마지막 구절을 읽고 놀랐다. 어떻게 이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그 자부심의 원동력은 뭘까. 운 좋게도 나는 작가에게 직접 질문할 기회를 얻었다. 소설을 쓴 킴 투이 작가와 함께 앤솔러지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나는 먼 이국에서 날아온 작가와 북토크를 하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캐나다의 얼굴'이라 말할 만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나요? 베트남에서 태어난 작가는 보트피플로 난민 생활을 했던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그건 제가 캐나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캐나다가 절 사랑하든 안 하든 상관없어요. 제가 사랑하니까요. 처음 퀘벡에 도착했을 때가 생각나요. 좁은 곳에서 많은 사람과 지냈던 터라 제 몸에선 엄청난 악취가 났죠. 만약 지금 제가 그때의 어린 저를 본다면 쉽게 다가가지 못했을 거예요. 그때 절 맞아준 사람들은 정말 따듯하게 안아줬어요. 이마를 맞대고 아무 거리낌 없이 포옹해줬죠. 저는 그걸 기억해요."

내가 문자로 다 옮기지 못할 만큼 작가의 묘사는 생생하고 감동적이었다. 나는 먹먹함에 고개만 끄덕일 뿐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튿날 피로가 덜 풀린 상태로 책을 읽다 문득 작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읽고 있던 책은 전날 행사와 관련 없는 내용이었고 나는 그날 일을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마치 고요한 밀물이 밀려오듯 어린 시절을 회상하던 작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면서 경이로움이 차올랐다. 차분하고 신비롭게, 그 이야기의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사랑의 얼굴이었다. 사랑을 확신하는 한 사람의 얼굴. 살 곳 없는 누추한 소녀를 두 팔로 가득 끌어안아준 누군가의 진심 어린 환대. 그 환대를 체험한 아이의 마음이 중년이 된 작가를 거쳐 내게로 전해지는 듯했다.

나는 가만히 책을 덮고 그 얼굴이 내 안에 스미도록 기다렸다.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거구나. 단 한 번이라도 사랑의 얼굴을 마주했다면, 그 얼굴과 이마를 맞대고 깊이 포옹해봤다면, 더는 보거나 만질 수 없을지라도 '나는 사랑을 안다'고 증언하게 만드는구나. 작가는 그 구원의 순간을 잊지 않고 글로 썼다. 그리고 나는 사랑이 비쳐든 사람의 얼굴이 얼마나 환하게 빛나는지 목격했다. 사랑과 끌어안았던 그 이야기에 힘입어 나는 오랜 의심을 걷고 감히 사랑을 확신하길 꿈꿔본다.

[김멜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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