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디스토피아? 유토피아?[이주영의 연뮤덕질기](34)

2024. 10. 25.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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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모든> · <간과 강> , 뮤지컬 <애니> · <부치하난> 등
뮤지컬 <부치하난>에서 객석을 유영하는 고래 장면/ 라이브러리컴퍼니



‘기승전 인공지능(AI)’ 세상이 도래했다. 2020년 이후 문화예술계 지원금이 AI와 논휴먼(non-human·비인간) 분야에 몰려서인지 관련 공연들이 다채롭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그려낸 세상이 대부분 디스토피아(dystopia·부정적인 측면을 극대화한 암울한 세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을 다룬 SF 장르와 디스토피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생산성 향상과 삶의 편의를 도모하는 기술 지향적 현대인에게 자칫 균형을 잃으면 암울한 미래뿐이라는 경고와 자각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챗GPT나 소형 AI 로봇이 일상에 스며드는 요즘 상연되는 관련 작품은 더이상 SF가 아니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가끔은 머리끝이 쭈뼛 서기도 한다.

인간다움 말소하는 AI 통제 사회

올해 상연된 관련 작품들의 면면을 돌아보니 이런 세계관을 다루는 작품은 대략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AI 지배 세상을 풍자하고 직시하는 작품들이다. 연극 <거의 인간>, <전기 없는 마을>, <아이들>, <모든> 등은 피폐한 미래를 돌본다. <거의 인간>은 한때 대세였던 작가가 딥러닝(인간의 두뇌활동을 흉내 낸 기계학습 방법)을 시킨 AI 작가가 인간을 대체하고, 인공 자궁이 보편화한 사회를 ‘막장 드라마’처럼 담았다. 폐허가 된 마을의 전기를 끊으러 다니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AI 로봇의 종말을 그린 <전기 없는 마을>, 원전 파괴 후 피폭된 청년 과학자들을 구하려는 원로 과학자들의 성찰을 담은 <아이들>, 소수의 인류만 거주하는 돔에서 초인공지능에 통제된 인간의 탈출을 그린 <모든> 등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사라지고 단절이 지속하면 더 이상 인간일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모든>은 초인공지능 라이카에 통제돼 통증마저 느끼지 못하는 미래인의 삶을 얇은 상자로 된 단칸방으로 대변한다. 인간들은 바로 옆에 모여 있지만 아무도 없는 것과 같다. 초인공지능이 인간들끼리의 연대와 대화는 분절화하고 시스템이 판단한 합리적 기계와의 결합만 채택하기 때문이다. 이를 자각한 인간이 시스템과 접속 해제를 시도하지만, 그것은 곧 죽음이다.

직접적인 대면, 즉 아날로그적인 만남보다 매체를 매개로 한 디지털 연결에 더 치중된 현대인의 삶(온갖 SNS와 미디어 연결은 기본인)도 이 가상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이미 디지털에 의존하기 시작한 삶은 초인공지능 등장과 동시에 더 강력히 구속될 수 있다는 경고다. 이 작품의 미장센(무대구성)은 특별하다. 큰 도구 없이 양 측면과 천장에 조밀하게 설치된 조명디자인으로 모든 세트를 대체했다. 공연이 끝난 후 폐기해야 하는 큰 도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친환경적인 작품이다.

두 번째는 시스템이나 미디어에 의존한 인류의 공허함과 무기력을 담은 초현실주의 미장센을 내세운 작품들이다. 종말을 맞는 무기력과 분절적인 인간들의 심리를 감각에 의존해 다룬 연극 <간과 강>, 가부장에 대항해 젠더 평등과 다양성에 대한 인식 확장을 낙서로 표현한 <지상의 여자들>,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전을 표현주의 미학으로 재해석해 19세기 말 종교와 억압에 대한 일탈을 그린 오페라 <탄호이저> 등이다.

연극 <모든>에서 AI가 통제하는 분절된 인간사회의 한 장면 / 국립극단



연극 <간과 강>은 한강이 보이는 낡은 아파트에서 외도하는 남편과 사는 무기력한 중년 여성의 일상을 컬트영화처럼 담아낸다. 집안에 생긴 싱크홀과 첫사랑이 인어가 돼 나타나는 설정은 기괴하고 분절적이다. 거대한 한강대교가 무대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전체를 가로지른다. 기울어진 무대 바닥 위에 설치된 침대와 테이블은 맥주를 들이켜는 과정에서 하나씩 사라진다. 그 와중에 주인공은 낚시도구를 쌓아놓고 누군가는 한강대교에 걸터앉아 낚시한다. 주인공 L의 첫사랑이 인어가 되어 등장하며 춤을 추는 마무리는 서사적 도약이 급박함에도 어쩐지 후련하다. 시스템 바깥의 삶에 대한 자각과 공포는 자조와 무기력에서 맥락을 끊어낸 용기와 대범함으로 마무리된다. 디스토피아에 찌들어 사는 주인공 L이 어느 순간 해탈하듯, 자기만의 유토피아를 찾아낸 것이다.

유토피아 꿈꾸는 객석 카메라와 고래

세 번째 경향은 시스템 종속사회를 딛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판타지 작품이다. 고아 소녀 애니와 친구들이 재벌 워벅스와 만나 연대와 부녀의 정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은 뮤지컬 <애니>, 전설 속 물 부족 세상을 살아가는 부족들 간의 전쟁과 현재 생존하려는 청춘의 애환을 교차하며 고래 모형으로 희망을 전하는 <부치하난>, 가족을 잃고 남극으로 향한 연구원들이 로봇의 보조를 받으며 고통을 잊게 하는 운석을 통해 삶을 돌아본 뮤지컬 <리히터>, 호수의 심연과 수면을 오가는 백조들의 생존 경쟁과 자연 친화적인 삶을 통해 자유를 자유롭게 담아낸 무용극 <백조의 잠수> 등이 그러하다.

<애니>의 경우 극 중 객석을 향하는 라이브 ENG 카메라(손이나 어깨로 들고 다니는 카메라)를 통해 자신을 버린 부모 찾기 광고를 녹음하는 고아 소녀 애니와 이를 응원하는 관객의 이미지를 하나의 시공간에 담는다. 무대 위에 영사된 애니 또래 어린이 관객들이 손을 흔들고 뛰는 모습은 관객과 출연진들 모두를 희망에 들뜨게 한다.

<부치하난>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객석을 유영하는 고래가 등장한다. 현대의 주인공 누리와 태경이 전설 속 부치하난과 올라처럼 비극적인 죽음을 맞지 않고 생존해 사랑을 확인하는 마지막 장면에 객석으로 헤엄쳐 나오는 고래는 디스토피아를 극복한 그들만의 유토피아다. 실제 객석 위를 날아다니는 초대형 고래는 로봇공학의 애니매트로닉스 기술이 적용돼 지느러미 움직임까지 섬세하다. 강력한 소형 드론을 엔진으로 서서히 2층 객석까지 날아오르니 순식간에 공연장 전체가 바닷속이 돼버린다. 관객들의 복잡한 고민이 일거에 사라지게 만든다.

물리적인 만남을 통해 온기와 정서를 공유하는 것은 인간다움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향인 유토피아의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말했다. 쉽게 표현하면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같은, 개인화된 숨 쉬는 공간이다. 모든 것이 AI로 대체된다 해도 인간에게는 온기와 정서를 나눌 공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위에 언급한 대부분 작품은 상연이 끝났다. <부치하난>은 오는 11월 17일까지 상연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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