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자 보호와 개인채무자보호법의 한계[전성인의 난세직필]

2024. 10. 25.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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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채무자 보호법이 시행되면서 금융채무자의 보호 측면에서는 과거보다 진일보했지만, 아직도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교대역에 게시돼 있는 채무 관련 법무법인 광고물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문재원 기자



지난 10월 17일 ‘개인금융채권의 관리 및 개인금융채무자의 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개인채무자보호법)이 시행에 들어갔다. 이 법이 시행되면서 금융채무자의 보호 측면에서 분명히 과거보다 진일보한 상황이 기대된다. 그러나 채무자 보호에는 아직도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 이하에서는 이 법 시행에 즈음해 채무자 보호의 본질적 필요성과 이 법 시행상의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혹시 사람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무슨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 세상에서의 사례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본 적이 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두 번 다 돈 문제였다. 한 번은 채무 재조정과 관련한 발표를 하기 위해 개인파산을 경험한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했을 때였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보내는 눈빛은 폐부를 찌르기에 족했다. 다른 한 번은 부실 경영으로 퇴출 대상이 된 미래저축은행 사태에 관한 토론회 때였다. 알토란 같은 돈을 저축은행에 넣었다가 예금보호 한도를 초과하는 돈을 떼이게 된 예금자들의 눈에서는 그야말로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형형한 불빛이 나왔다.

개인채무자보호법은 분명 진일보

돈이란 무서운 것이다. 남의 돈을 꿀꺽하거나 제대로 갚지 못한 경우 끔찍한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떼인 돈을 받아 드린다는 ‘형님’들이 나서고, 추심에 지친 채무자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성난 예금자들의 성화에 지친 금융회사 직원들도 극단적 선택을 한다. 가히 인간 사회 갈등의 막장이 거기 있다.

돈 문제가 얽혔을 때도 갑과 을이 존재한다. 무한히 소송할 수 있는 금융회사가 갑이고, 역량과 정보가 제한된 개인들이 을이다. 을은 금융회사와 맺은 관계에 따라 채무자가 될 수도, 채권자가 될 수도 있다. 빚 갚을 날이 돌아왔으나 갚을 돈이 없어 연체 중인 을은 채무자고, 부실 저축은행의 예금자나 불완전 판매에 속아 부실 펀드에 투자한 을은 채권자다.

이 두 가지 상황 모두에서 을은 갑인 금융회사와 대등한 상태에서 거래할 수 없기 때문에 정책적 보호 대상이 돼야 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을이 채권자인 경우에는 그래도 제도적 보호 장치가 어느 정도 마련돼 있다. 일정 한도까지 예금 지급을 보장하는 예금자보호법이 시행 중이고, 불완전 판매나 사기적 판매로부터 투자자를 보호하는 자본시장법과 금융소비자 보호법도 제정된 상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금융투자상품의 판매자에 대해서는 설명 의무나 적합성의 원칙처럼 ‘고객보호 의무’라는 근원적 의무도 도입됐다.

이에 비해 채무자인 을을 보호하는 제도는 답보상태다. 채무자회생법상의 파산 절차는 일부 채무자 보호 효과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여러 채권자가 파산자의 재산을 질서 있게 뺏어가는 것을 규율하는 법이다. 개인회생절차 역시 주택을 담보로 잡힌 채무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회생 기간도 노예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장기간이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신용회복위원회가 주관하는 신용회복 절차 역시 기본적으로 채권자인 은행들과 그 큰 형님 격인 금융위원회가 주도하는 절차다.

채무자 보호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금융회사가 채무자 보호 또는 채무 재조정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에 관한 논리가 정립되지 있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투자자 보호를 논할 때 금융회사가 ‘(일반 투자자에 대해) 고객보호 의무’를 부담한다는 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채권자인 금융회사가 ‘특정 채무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진다’는 원칙은 생소하기만 하다. 오히려 채무자 보호 문제가 나오기만 하면 금융회사들은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득달같이 들고나온다. 참으로 갈 길이 멀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새로 시행되는 개인채무자보호법은 분명 진일보한 법이다. 금융채무를 지고 있는 개인채무자에 대한 금융회사의 채권 회수 행위에 명시적 제한을 가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이 법은 3000만원 미만의 채무를 진 채무자에 대해 금융회사는 과도한 채권추심을 할 수 없고, 채무자가 채무 재조정을 요구할 경우 이에 성실하게 응해야 할 의무를 부과했다. 연체 이자의 산정 방식도 조금 더 합리적으로 조정했다.

유예 기간 추가는 월권…즉각 시행해야

그러나 이 법에는 아직도 세 가지 문제가 있다. 두 가지는 법의 본질적 내용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법의 시행과 관련된 것이다.

첫 번째 문제는 이 법의 혜택이 일부의 소액 채권자로 지나치게 좁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이런 제약을 규정한 독소 조항은 제3조다. 제3조는 이 법에 등장하는 여러 채무자 보호 장치의 적용을 배제하는 규정인데 기본적으로 3000만원 이상 채무를 진 채무자는 적용에서 배제된다. 물론 채무자 보호 장치를 모든 채무자에게 적용할 필요는 없지만 왜 3000만원 미만의 채무자만 보호 대상이 돼야 하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는 논거를 찾기는 어렵다.

두 번째 문제는 이 법이 채권 금융회사의 특정 행위만을 규제할 뿐, 왜 금융회사가 그런 규제의 대상이 돼야 하는가에 관해 더욱 근원적인 법률적 논거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법률적 논거는 ‘채무자를 보호할 의무’를 천명하는 것인데, 이 법에는 그런 보호 의무가 명시적으로 도입돼 있지 않다. 기껏 눈을 씻고 찾은 조항이 제4조 제2항인데 이에 따르면 금융회사는 “개인금융채무자의 권익을 침해하지 아니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노력할 의무라고? 문제가 참 많다. 예를 들어 이 조항을 “금융회사는 개인금융채무자의 권익을 침해하여서는 아니된다”는 가상적 조문과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실감할 수 있다.

세 번째 문제는 그나마 절반의 성공에 불과한 이 법의 시행을 금융위원회가 “계도”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대체 누굴 계도하기 위해 유예가 필요하다는 것인가? 법을 준수할 대상자가 금융회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계도의 대상 역시 금융회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법 부칙에서 공포 후 시행까지 9개월의 유예 기간을 이미 부여했다. 9개월이라면 금융회사들이 새 법의 시행을 준비하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금융위원회가 임의로 3개월의 유예 기간을 추가한 것은 월권일 뿐이다. 마땅히 즉각 시행해야 한다.

채무자를 보호하는 것은 돈이 얽힌 문제라서 원래 어렵다. 반발과 저항도 만만치 않다. 그래도 보호해야 한다. 금융위원회와 금융회사의 근본적인 인식 전환을 촉구한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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