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의 모래들...검찰은 ‘추적자’, 깡패는 ‘못된 길동무들’, 카지노는 ‘작은 집’ [말록 홈즈]

2024. 10. 25.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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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렉스 에티몰로지’란 ‘자랑용(flex) 어원풀이(etymology)’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쓰는 말들의 본래 뜻을 찾아, 독자를 ‘지식인싸’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작은 단서들로 큰 사건을 풀어 나가는 셜록 홈즈처럼, 말록 홈즈는 어원 하나하나의 뜻에서 생활 속 궁금증을 해결해 드립니다. 우리는 단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쓰곤 합니다. 고학력과 스마트 기기가 일상화된 시대에, ‘문해력 감소’라는 ‘글 읽는 까막눈 현상’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습니다. 단어는 사물과 현상의 특성을 가장 핵심적으로 축약한 기초개념입니다. 우리는 단어의 뜻을 찾아가면서, 지식의 본질과 핵심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와 학교를 떠난 이들의 지식 인싸력도 레벨업됩니다.

[말록 홈즈 39화]

얼마 전 우연히 옛날 드라마 ‘모래시계’를 보았습니다. 1995년 1월부터 2월까지, 저녁이면 온 국민을 안방 TV 앞으로 모을 만큼 인기가 높아 ‘귀가시계’로도 불렸던 명작입니다. 30여 년 전 추억에 젖어 한 편 두 편 시청하다 보니, 어느덧 24부를 완주하고 말았습니다.

1960년대 전라남도의 한 고등학교로 전학 온 주먹 센 소년 박태수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고급 술집에서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지켜보며, 국회의원조차 압도할 수 있는 대통령을 꿈꿉니다. 같은 반 모범생 강우석에게 공부를 배우는 대신,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육군사관학교 입시에서 타계한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는 이유로 탈락하고, 급작스런 사고로 어머니까지 여의면서 암흑가로 들어섭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농민의 아들 우석은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바른 법조인이 되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하지만, 상대 조직에게 쫓기는 태수를 돕다가 사법고시 시험장에 들어가지 못해 탈락하고 군대에 갑니다. 카지노 재벌의 딸 윤혜린은 가난한 집 출신으로 위장하고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투신하지만, 결국 현실의 벽에 부딪혀 가업을 물려받습니다. 이들은 성인이 된 1970~1980년대, 각각 노동자를 지원하는 운동가와 진압 깡패로, 계엄군과 시민군으로, 카지노 재벌과 재벌이 고용한 깡패로, 권력과 유착한 재벌과 비리를 들춰내는 검사로 마주합니다. 극의 종반부, 거물로 성장한 깡패 태수는 연인이던 혜린을 구하려고 다른 깡패 조직의 두목을 살해 후, 검사이자 친구인 우석의 사형구형을 받고 삶을 마감합니다.

30년 전 봤던 액션드라마가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깡패 박태수를 연기했던 최민수 형의 압도적 카리스마와 화려한 액션에만 매료됐었는데, 기성세대가 된 지금은 몰랐던 것들이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권력, 재벌, 깡패가 얽혀 있던 대한민국의 씁쓰레한 현대사가 보였습니다. 거대한 힘 앞에도 올곧은 신념으로 용감하고 정의롭게 맞섰던 강우석 검사(박성원 분)와 신영진 기자(이승연 분)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들, 옛날에 봤던 드라마인데, 참 재밌게도 보네.”

어머니가 채널을 돌리자고 말씀하십니다.

“엄마도 들었던 노래 다시 들으시잖아요. 드라마도 다시 보면 음식 오래 씹는 것 같은 깊은 맛이 있더라구요.”

빙긋 웃는 표정으로 어머니가 말씀을 이으십니다.

“오늘 저녁은 점심에 먹던 가자미나 데워야겠다. 오래오래 먹으렴. 꼭꼭 씹어서.”

“엄만, 팥쥐 엄마야!”

“너는 팥쥐야!”

오늘은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흘러내렸던 모래들의 어원을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1. 국가(國家: 나라 국, 집 가):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는 최고 권위의 공동체입니다. ‘집 가(家)’자에는 왕조를 의미하는 ‘조정(朝廷)’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나라집’보다는 ‘나라정부’라는 해석이 자연스럽게 다가옵니다.

나라의 영단어 country는 ‘맞은편’을 의미하는 contra에서 왔는데, ‘(땅)이 반대편에 있다/(땅)이 앞에 펼쳐지다)’라는 의미의 통속라틴어 ‘(terra) contrata’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출처: wiktionary). 영어 어원사전인 Etymolonline은 contra를 ‘비교적으로’를 뜻하는 ‘com-teros’에서 왔다고 설명하는데, 이 com-teros의 com은 ‘함께’를 의미합니다. ‘함께 사는 땅/지역’이라고 추측하면 자연스러운데, 이를 거론한 구체적 문헌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 ‘도시국가’로 배운 ‘polis’는 본래 ‘성, 요새, 도시’를 뜻합니다. 성과 언덕 꼭대기를 가리키는 인도유럽조어 ‘tpolh-‘에서 왔습니다.

Nation은 ‘출생, 기원, 종족’을 뜻하는 라틴어 nationem에서 왔습니다. ‘태어난 것’이란 의미의 인도유럽조어 ‘gene-‘에서 유래한 낱말입니다. ‘같은 민족과 가족 구성원의 집단’이란 의미에서 출발했습니다.

2. 정권(政權: 다스릴 정, 권세/힘 권): 정권은 ‘정치적 권력(political power)’를 가리킵니다. 정권과 정부를 뜻하는 영단어 ‘government’는 ‘배를 조종하다’는 뜻의 그리스어 ‘kybernan’에서 유래했습니다. 나라라는 커다랗고 소중한 배의 방향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힘입니다.

3. 검찰(檢察: 조사할 검, 살필 찰): 검사는 잘못된 일들을 조사하고 살펴, 법을 바르게 집행하도록 요구하는 공무원입니다. 영단어 prosecutor는 ‘추적하여 어떤 과정이나 행위를 이루거나 얻고자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라틴어의 prosecutus, prosequi의 과거분사로 ‘따라가다, 추적하다, 공격하다, 비난하다’를 뜻합니다. ‘Pro’는 ‘앞으로’를, 인도유럽조어인 ‘sekw-‘는 ‘따르다’를 가리킵니다. ‘피의자를 추적해 법정에 세워, 합당한 벌을 받도록 이끄는 사람’입니다. 언젠가 제가 다른 행성에 나라를 세운다면, 검사님들께 연봉을 50억쯤 지급해서, 정의와 공정에 최선을 다하시도록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4. 재벌(財閥: 재물 재, 가문 벌): 재벌은 재물을 가진 가문이나 세력을 뜻합니다. 군인 파벌 군벌(軍閥), 학교 파벌 학벌(學閥)과 유사한 구조입니다. 한자어 재벌과 영단어 ‘conglomerate’는 같은 듯 다릅니다. 재벌이란 말이 가문 중심인 것과 달리, conglomerate는 사업에 중점을 둔 말입니다. 라틴어 conglomerare에서 ‘con’은 ‘함께’를, ‘glomerare’는 ‘공, 공 모양 덩어리’를 뜻합니다. ‘함께 굴리다, 집중시키다, 쌓아올리다’를 뜻하는 말입니다.

5. 카지노(Casino): ‘도박장, 작은 집’을 가리키는 casino는 ‘집’을 뜻하며, 라틴어 ‘casa’에서 유래했습니다. ‘귀족들의 도박을 위한 건물’이란 의미는 19세 초반 등장했습니다.

6. 깡패(Gangster): 깽패는 영어 gangster에서 온 말입니다. 고대영어인 ‘gang’은 본래 ‘가다, 여행, 길, 통로’를 의미했습니다.(‘-ster’는 ‘행위자’). ‘걷다’를 의미하는 인도유럽조어 ‘ghengh-‘에서 유래한 걸로 추정됩니다. 17세기에 항해용어로 ‘일하는 사람들의 모임’, ‘함께 여행하는 이들의 무리’로 변환됐으며, 특히 범죄집단을 비난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부터 ‘못된 짓 하는 패거리 혹은 그 패거리의 멤버’란 의미로 쓰이죠. 결국 ‘못된 길동무들’이군요.

7. 언론(言論: 말씀 언, 말씀 론): 대중매체를 의미합니다. 영어단어는 ‘media’는 ‘중간, 간격’을 뜻하는 라틴어 ‘medium’에서 왔습니다. 16세기 이후 ‘매개물, 소통 채널’이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해, 18세기에는 ‘인쇄 매체’라는 뜻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모래시계의 모래 ‘sand’는 ‘붓다’를 뜻하는 인도유럽조어 ‘sem-’에서 온 것 같습니다. 극 중 정치권력과 깡패를 이용하여 성공한 카지노재벌 윤 회장(박근형 분)은, 인생은 모래시계처럼 한번 흘러가면 되돌릴 수 없는 거라 말하더군요. 정작 그는 권력과 깡패에게 배신당해, 심장마비로 스러져가죠. 요즘처럼 상식에 대해 혼동이 오는 시기가 없었기에, 드라마의 여운이 짙습니다. 특히 용기 있게 바름을 실천한 강우석 검사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가슴에 새겨지는군요. 정의로운 검사(檢事)님들이 가득한 나라가 되길 소망합니다.

모래시계의 박태수가 씁쓸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을 뤼튼으로 그려 보았다.
*감수: 안희돈 교수(건국대 영어영문학과). 건국대 다언어다문화연구소 소장. 전 한국언어학회 회장

[필자 소개]

말록 홈즈. 어원 연구가/작가/커뮤니케이터/크리에이터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23년째 활동 중. 기자들이 손꼽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커뮤니케이터. 회사와 제품 소개에 멀티랭귀지 어원풀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어원풀이와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융합해, 기업 유튜브 영상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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