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과 관계 개선 추구하는 아프간 2인자 하카니
20년 전쟁 내내 여러 차례 미와 타협 시도
최고 권력자와 권력 투쟁하며 실용 노선 추구
아프간 전쟁 실패 뼈아픈 미국, 관계 개선 꺼린다
[서울=뉴시스] 강영진 기자 = 아프가니스탄 전쟁 20년 대부분 동안 미군과 현지 주민들에게 최악의 공포를 안겼던 탈레반 지도자 시라후딘 하카니가 실용주의적 정치가로 변신했다고 미 뉴욕타임스(NYT)가 24일(현지시각) 보도했다.
하카니는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마귀였다. 탈레반 자살 공격대원을 지명하고 전 세계 지하드 성전에서 유령과 같은 핵심 인물이었으며 알카에다 등 각종 테러단체들과 깊은 관련을 맺었고 미군이 1000만 달러(약 138억 원)의 현상금을 건 최고위급 수배자였다.
그러나 2021년 미군이 철수한 뒤 하카니는 스스로를 실용주의적 정치가이자 신뢰할 수 있는 외교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종교 극단주의가 팽배한 나라의 정부에서 비교적 온건한 목소리를 낸다.
하카니의 변신은 지난 3년 동안의 탈레반 내부 권력 투쟁의 결과다. 강경 종교 지도자이자 국가수반인 하이바툴라 아쿤자다가 추진하는 여성 권리 제한으로 아프가니스탄이 고립되는 것에 반대하면서다.
하카니는 주요 정책 결정 권한을 쥐고 있는 하이바툴라에 가장 강력히 도전하고 있다. 하카니는 여성 교육 재개와 공무원 일자리 부여를 암암리에 지지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또 서방 문화와 정책을 비난하는 하이바툴라와 서방 사이에서 중재자를 자처한다.
외교 순방에 나서 자신의 비전과 테러 단체 제한 등 공통 이익 실현을 강조하는 막후 채널 역할을 하고 있다. 유럽 몇 나라와 이슬람 국가들, 러시아, 중국 등과 수교도 성사시켰다.
하카니는 올해 아프간 수도 카불에서 두 번째로 가진 서방 언론과 인터뷰에서 “우리는 세계와 긍정적으로 관계를 맺는 시대를 열었으며 폭력과 전쟁의 시대는 끝났다”고 강조했다.
서방 외교관들은 하카니의 변신을 놀라워하며 반신반의한다. 그는 권력을 갈구하는 정략적 인물이자 유혈 투쟁의 선봉이던 지하디스트지로만 알려졌을 뿐 출생 시기와 고향과 같은 기본적 정보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수께끼 속 인물이었다. 여성 권리 복원 등의 정책은 순수한 개인적 관심사라기보다 하이바툴라에 도전하는 자신을 서방이 지지하도록 유도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아프간 전쟁 중 하카니는 미국과 화해를 여러 번 추구했다. 그러나 미국이 하카니를 거부했다. 전쟁 동안 대량 학살을 주도한 구제불능이며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이유였다.
일부에선 미국이 하카니의 대화 요청을 거부함으로써 테러와의 전쟁으로 파괴하려는 적을 오히려 만들어낸 때문에 전쟁이 길어졌다고 지적한다.
또 미국이 지금처럼 계속 하카니를 배척하면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를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반군 시절
하카니는 3시간 동안 자신의 성장과정과 미국과의 투쟁, 자기 가족과 미 당국자들 사이의 비밀 교섭 등에 대해 설명했다. 자신은 폭력과 전쟁을 끝내는 것이 목표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지난 한 세기 6차례의 쿠데타와 소련 및 미국과 전쟁을 치른 아프간이 가진 간절한 소망이지만 수백, 수천 명을 살해한 사람 입에서 그런 소망을 듣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1970년 소련 침공 즈음 출생한 하카니는 파키스탄 미란 샤 난민촌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잘랄루딘 하카니는 소련군에 맞선 무자헤딘의 유력 지휘관으로 남아시아와 페르시아만 국가에 강력한 후원자가 있던 사람이다.
잘랄루딘 하카니는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 정보기관과 긴밀한 관계였다.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수십 만 달러 상당의 무기를 그에게 지원했다.
잘랄루딘은 아들 시라후딘에게 자신의 지하드 네트워크를 맡겼다. 아랍 전역에 걸친 마약, 납치, 갈취 범죄를 통해 자금을 마련하는 조직이었다. 시라후딘은 어릴 적부터 후계자 또는 지도자라는 의미의 “칼리파”로 불렸다.
시라후딘은 아프간 동부의 무자헤딘 훈련소를 방문해 아버지를 만난 일을 회상했다. 주변 전투 현장의 박격포 소리와 무자헤딘 전사들의 지독한 땀 냄새가 가득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전투 때문에 오지 못하자 자신과 형제들이 인근 산에 올라 전투를 지켜봤다고 했다.
하카니와 형제들은 아버지가 붙여준 개인 교사로부터 세계 정치와 종교를 공부했다. 하카니는 덕분에 탈레반 지도자 가운데 드물게 외부 세계에 눈을 떴다고 했다.
2001년 미국이 침공했을 때 하카니는 20대 초반이었으며 남동부 후스트 주 학교 학생이었다. 찍찍거리는 라디오 방송에서 수도 카불에 미사일이 쏟아지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학생들 모두가 분기탱천했다. “모두 젊고 힘에 넘쳤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싸울 준비가 돼 있었다”고 했다.
2006년 무너진 탈레반 정권은 반군으로 재조직됐다. 당시 하카니는 동부 지역 게릴라전을 이끌다가 뒤에 전국 탈레반 군사 전략 부책임자가 됐다.
그의 휘하에 있는 전사들은 반군 가운데 가장 훈련이 잘 돼 있었고 무장도 뛰어났다. 또 자살공격대원으로 구성된 대대를 조직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부대가 2017년 150명을 살해한 트럭 자살폭탄 공격을 가했다. 하카니의 부대는 2011년 카불의 미 대사관을 19시간 동안 공격하기도 했다. 2009년 인질이 됐던 미군 병사 보우 베그달도 몇 년 동안 하카니의 손아귀에 있었다.
미국은 2012년 탈레반 분파 중 유일하게 하카니 세력을 테러단체로 제재했다.
하카니는 자신이 미군의 추적을 피한 것을 자랑했다. 밤마다 최대 10번 이동하고 같은 차량을 두 번 사용한 적이 없으며 경호원들을 자신을 추적하는 미군의 2배로 뒀다고 했다. 자신이 온갖 무기를 가진 미국을 상대로 “아주 잘” 싸웠다고 자랑했다.
정치인 하카니
하카니가 탈레반 권력 투쟁에서 미묘한 위치에 있음을 감안할 때 그의 신중한 발언 태도는 이례적이지 않다. 탈레반은 표면적으로는 내전 재발 가능성을 우려해 단합을 내세우지만 내부적으로는 하카니 등 실용주의자와 하이바툴라로 대표되는 극보수 지도자 사이에 권력 투쟁이 치열하다.
2022년 봄 탈레반 당국자들이 발표한 여성 교육 재개를 뒤집은 하이바툴라에 대한 반발이 상당한 것으로 전해지는 가운데 하카니 등 실용주의자들이 하이바툴라에게 억압정책을 완화하도록 청원했다. 이들은 항의의 표시로 하이바툴라가 자신의 근거지 칸다하르에서 소집한 회의에 불참하기도 했다.
지난해 연설에서 하카니는 탈레반 지도부가 권력을 독점하면서 신뢰를 잃었다고 했다. 외부에 하이바툴라를 겨냥한 메시지로 비쳐진 발언이었다.
공개적 반발은 최고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규정한 탈레반 법 위반 행위로 간주됐고 하이바툴라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반대 세력 전투원들을 칸다하르 기지에 소집해 자신의 사병 조직으로 만들고 여성 권한 억압을 오히려 강화해 하카니의 서방 접근 노력을 방해했다.
하카니는 내분이 있다는 주장을 강력히 배격했다. 그러나 외부에서는 그가 여전히 하이바툴라에게 도전하는 세력인 것으로 관측한다. 하카니는 불과 10년 전까지 하이바툴라에 이어 탈레반 세력의 2인자였다.
외교관 하카니
신뢰할 수 있는 실용적 지도자임을 자처하면서 테러 책임자라는 평판을 불식하려 노력하고 있다.
서방과 관계를 맺는 것을 이슬람 가치에 대한 배반으로 간주하는 탈레반 종교 지도자들과 서방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미국은 현재 아프간과 정식 국교 재개에 동의하지 않은 상태다. 여성 권리 제한이 해소돼야만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아프간에 대한 최대 지원국이면서도 아프간 중앙은행의 수십억 달러 자금을 동결하고 있다.
하카니는 여성 권리 신장에 대해선 적극 나서지 않지만 자신이 전 세계 테러에 가진 영향력을 활용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하카니는 이슬람국가(IS), 알카에다와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아프간에서 제기되는 테러 위협이 전 세계에 심각한 위협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고 하카니가 미국이 2022년 카불 공습으로 살해한 알카에다 수장 아이만 알자와히리의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점도 밝혀졌다. 또 파키스탄 당국자들은 하카니가 파키스탄 탈레반을 지원하는 것으로 비난한다.
이에 대해 하카니는 아프간에는 테러단체가 더 이상 없다고 강변했다. 현 정부가 장악하지 못한 지역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발언은 지난 3년 동안 서방을 공격한 일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협상가 하카니
아프간 주재 외교관 출신 바넷 루빈은 “미국은 그를 미국과 싸우는 반대 세력이라고 간주했으나 그들은 미국을 침략자로 보고 맞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쟁 당시에도 하카니는 미국과 관계를 맺으려 광범하게 노력했다. 가족들을 동원해 미국 당국자들과 비밀협상을 벌였다.
하카니의 부친이 미국 보호 아래의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 정권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 수십 명의 친척들과 지지자들을 수도 카불로 보냈다. 그러나 이들이 탄 차량이 카불에 도착하기 전 미군의 폭격을 당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하카니의 아버지가 동생 이브라힘 오마리를 다시 카불로 보내 미국과 교섭을 타진했으나 미군이 그를 체포했다.
시라후딘 하카니는 “미국인들이 우리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우리에게 전쟁을 강요했다. 우리는 대화, 협상, 화해를 원했으나 모두 허사였다”고 했다.
2004년 하카니 가문이 카르자이 대통령에게 다시 타협을 시도했으나 무시당했다. 당시 카르자이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우메르 다우자이에 따르면 “하카니 가문이 테러 단체가 되지 않게 할 기회가 있었으나 우리 의견이 묵살됐다”고 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2010년에도 하카니 가문은 비밀리에 접근을 시도했다. 미 당국자들과 비공식으로 편지를 주고 받음으로써 긴장을 낮추고 다른 이면 채널로 미 당국자들과 만남을 요구했다.
1년 뒤 하카니의 삼촌인 오마리가 파키스탄 정보기관장 안내로 두바이 래프즈 호텔에서 미 당국자들을 만났다.
2015년에는 하카니 가문이 처음으로 미 당국자들과 직접 교섭하면서 종전 방안을 논의했다.
오마리는 미국이 탈레반 정권을 무너트리고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으며 민주아프가니스탄공화국을 건설했는데 전쟁을 계속할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미 국무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특사 대행인 로렐 밀러는 전쟁이 길어지면 당초 전쟁 명분이 사라지고 전쟁이 목적이 된다면서 “미국이 현재 이를 바로잡으려 한다”고 답했다. 돌이켜보면 미국은 미국 땅에서 벌어진 대규모 테러 공격에 대한 복수에 눈이 멀어 적을 만들어낸 셈이다.
하카니가 현재 서방에 보내는 타협 신호는 과거 비밀 협상 경력을 감안할 때 믿을 만하다는 의견이 일부에서 제기된다. 하카니가 갑작스럽게 변신한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추구해온 전략적 파트너십을 추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망
하카니가 처음 정상회담에 나선 장면이다. 이를 두고 일부에선 하카니의 노선을 지지하는 세력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했다.
아프간 동부에 거점을 두고 있는 하카니는 올들어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서부의 지도자들과 몇 달 동안 회담했고 청년 탈레반 전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음을 보여주는 동영상을 유포시켰다.
그런 그가 서방에 손을 내밀고 있다. 하카니와 인터뷰도 그 일환이다. 그는 1년여 만에 처음으로 여성 교육 금지 완화를 언급했다. “여성 교육을 영구 금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발언은 독재 정부라도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지속될 수 있다는 생각을 드러낸다.
하카니의 노력이 일부 성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유엔이 하카니를 여행 금지 대상자 목록에서 잠정 삭제한 것이다. 덕분에 하카니는 아부다비와 하지 순례 기간 중 사우디 메카를 방문했다.
미국은 아직 하카니와 거리를 두고 있다. 20년 전쟁으로 수천 명이 목숨을 잃고 수많은 비용을 썼으나 탈레반이 다시 복귀한 상황에서 탈레반과 관계 개선은 도박일 수밖에 없다.
☞공감언론 뉴시스 yjkang1@newsis.com
Copyright ©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북한군, 25일 쿠르스크서 우크라와 교전…1명만 생존, 다수 사망”(종합)
- 안영미, '젖년이' '씨X' 논란 후 '얼굴 달랑' 사진 올려…"심정 빗댄 것?"
- '이범수와 이혼' 이윤진, 생이별 아들 만날까…"양육권 분쟁 중"
- 유준상 "뮤지컬 도중 칼 맞아…11바늘 꿰매"
- '4년만 이혼' 김민재, 재산분할만 80억?…"양육비 월 1000만원 넘을듯"
- 부산 지하철 100kg 멧돼지 출몰…당시 상황 보니(영상)
- 故김수미, 아들 아닌 며느리 서효림에 집 증여…애틋한 고부관계 재조명
- 김정민 "남친 수감 후 임신 알아…알콜 중독에 우울증"
- 66세 주병진, 200평 펜트하우스 공개 "가족 필요해"
- 배우 조윤희 "딸이 원하면 이동건에게 100% 보내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