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전 이건희의 추억..4년후 이재용의 미래
#1. 4년전 일요일(10월 25일) 아침 8시쯤 지인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으로 가보셔야겠다."
그 순간 그 말에는 기자와 수화기 너머의 지인 사이에는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메시지가 있었다. VIP 병동에 누워있던 '이건희 삼성 회장의 타계'를 알리는 말이었다. 삼성의 공식사망 발표 2시간 전의 일이다.
재계의 큰별이던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이 타계한 지도 벌써 4년이 지났다. 생전 이 선대회장은 '초일류' 기업의 '초격차' 기술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위기의식을 불어넣었다. 이 선대 회장이 당시 끊임없이 위기를 말했지만 그가 말한 위기는 '현재'가 아닌 '미래의 위기'였다.
항상 CEO들에게는 "5년 후나 10년 후 먹거리가 뭐냐"고 물었고, 그 답을 가져오지 못하는 CEO들에게 "미래를 예측하기 참 힘들다. 나도 모르는데 누가 미래를 알겠냐"며 미래에 대응할 수 있는 '인재'만이 답이라고 "인재를 찾아오라"고 CEO들을 다그쳤다.
이 선대 회장과는 공항 출입국 현장이나 행사장에서 자주 만나 질문할 기회가 있었고 그 때마다 이 선대 회장에게서 빠지지 않고 들었던 얘기는 "멀리 보고, 깊이 보라"는 선문답 같은 말이었다. 그는 삼성 CEO들에게 다가올 미래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라고 했다. 삼성의 1위 제품이 5~10년 후 사라질 것이라는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평소에는 별 말이 없는 이 선대 회장은 제품의 하자나 CEO들이 허위보고를 하면 불호령을 내리곤 했다. 일례로 2007년 중반에 열린 선진제품비교전시회에서 황창규 반도체총괄 사장의 일화는 유명하다. 황사장은 당시 메모리신성장론인 '황의법칙'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을 때다.
이 선대 회장은 그 자리에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의 수율(칩 양품 비율)이 경쟁사인 하이닉스반도체에 뒤쳐졌다는 보고를 받고 그동안 경쟁사보다 앞선다고 자신을 속였다며 "어떻게 뒤질 수 있냐"고 황 사장을 강하게 질책했다. 행사장인 강당이 쩌렁쩌렁할 정도로 큰 소리로 질책한 직후인 7월 13일 이 선대 회장은 황 사장을 인사조치했다.
그 후 KT 회장까지 역임한 황 사장은 지난해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누군가의 잘못된 보고로 선대 회장께서 오해가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 사실상 황사장을 메모리사업부장 자리에서 끌어내렸던 인물은 과거 후배였다. 삼성전자에서 밀려나 SK하이닉스로 갔던 생산공정혁신의 대가로 불렸던 인물이 하이닉스에서 와신상담해 삼성전자를 앞질렀던 것이다.
#2. 이 선대 회장의 4주기를 하루 앞둔 24일 SK하이닉스는 사상 최대의 영업이익을 올린 실적을 발표했다. 창사(현대전자·LG반도체 포함)이래 40년만에 처음으로 메모리 이익에서 삼성전자를 앞섰다. 여전히 매출에서는 삼성전자가 앞서지만 고대역메모리(HBM)의 고수익(이익률 40%)으로 인한 결과다.
1993년 세계 메모리 1위 자리에 오른 이후 한번도 그 자리를 내놓지 않았던 삼성전자가 30년만에 SK하이닉스에 메모리 1위 자리를 내줄 처지다. 대한민국 국민 입장에서야 메모리반도체 분야 1위가 삼성전자든 SK하이닉스든 상관없는 일이지만 삼성 입장에서는 다르다. 요즘 어디를 가나 삼성전자에 대한 걱정의 목소리가 많다.
외국인 지분율이 여전히 53%지만 420만명의 국내 개인주주들은 동네 식당이나 노포에서도 삼성전자에 대한 걱정을 하나둘씩 던진다. 이제는 모두가 HBM과 삼성전자 전문가가 된 것처럼 너나 할 것 없이 훈수를 두지 않는 이가 없다.
사실 올해 삼성전자는 매출 300조원 전후로 영업이익도 30조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돼 비난받을 실적은 아니다. 전세계에 이만한 실적을 내는 기업도 흔치 않다. 문제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5~10년후에 대한 준비가 잘 되고 있느냐다.
사실 이건희의 시대와 이재용의 시대는 다르다. 패스트팔로우어(빠른 추격자)의 시대와 퍼스트무버(선도자)의 시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선대회장은 그동안 일본과 미국을 롤모델 삼아 더 높은 효율에 집중해 빠르게 선두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이제 앞에 아무도 없는 퍼스트무버의 입장에서 삼성의 방황기와 이재용 회장의 수감 및 재판이 맞물리면서 미래준비가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선대 회장 타계 후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회장은 재판에 얽매여있다. 법정에서 보는 이 회장의 모습은 늘 위축돼 있다. 두번의 수형생활이 그를 더 깊이 움츠러들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마냥 재판이 끝날 때까지 멈춰 서 있을 수는 없다. 삼성은 달리는 자전거다. 가속페달을 밟지 않고 서 있으면 쓰러진다. 오는 27일이면 벌써 이 회장 취임 2주년이고, 4년 후면 이 회장의 나이도 벌써 이순(耳順: 60세)이다. 이것저것 가리며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외부에선 삼성의 위기가 인사·소통의 문제니, 사업지원TF의 문제니 하지만 이 모든 문제를 풀 키는 이 회장이 쥐고 있다. '호부무견자(虎父無犬子)'라고 했다. 이병철 창업회장과 이건희 선대회장이라는 호랑이의 뒤를 이어 승어부(勝於父: 아버지보다 뛰어난 아들)할 수 있다. 이 회장이 대학 때 친구들과 지리산을 포함해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거대한 자연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도전했던 그 마음이면 된다. 인공지능(AI) 시대의 큰 도전 앞에 위축되지 말고 다시 한번 퀀텀점프를 위해 거침없이 나아가길 바란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hunt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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