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짝 뒤에서 응시한 폭력성, 그리고 남겨진 이의 슬픔

이호재 기자 2024. 10. 25.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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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문학 속으로]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다루며 사회로 시선 확장
잔혹한 현실 생생하게 전달… ‘증인 문학’ 평가

“담임을 한 건 아닌데 작문해서 내라고 하면 곧잘 쓰던 애여서 기억이 나.”

1980년 초가을의 어느 일요일. 당시 열 살 소녀였던 한강 작가는 식탁에서 아버지인 소설가 한승원이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다. 작은고모가 “오빠가 가르친 애였어요?”라고 묻자 한승원이 가족 앞에서 한 소년과 얽힌 일화를 꺼낸 것이다.

한승원은 몇 년 전 집을 팔고 이사 가면서 부동산에서 매수인과 계약했다. 한승원이 중학교 선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니 집 사는 사람이 반가워했다. 매수인은 “막내아들이 중학생”이라고 알은체를 했다. 한승원은 학교에서 그 집 소년을 눈여겨봤고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후 한승원은 1980년 1월 광주에서 선생으로 살던 생활을 정리하고 전업으로 작가 일에 집중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사연을 전해 들은 어른들은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야기를 함께 들은 어린 한강은 사연을 몰라 궁금해했다. 왜 어른들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는가. 왜 소년의 이름을 말하기 직전에 알 수 없는 망설임이 끼어드는가.

34년이 지나 한강은 궁금증에 대한 답을 내놨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를 펴내면서다. 어린 시절 들었던 질문에 답하려 노력한 그의 집념이 통했던 걸까. 그의 6번째 장편소설인 이 작품은 2014년 출간 직후 한국 만해문학상,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받으며 국내외에서 주목받았다. 10일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 40만 부가 팔리는 등 국내에서만 100만 부 이상 판매돼 밀리언셀러에 등극했다.

소설은 1980년 중학교 3학년이던 소년 동호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동호는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친구 정대가 계엄군에 의해 살해되자 시민군의 시신을 관리하는 일을 돕는다. 매일 시신들을 수습하면서 동호는 여러 생각에 빠진다. 주검들의 말 없는 혼을 위로하기 위해 초를 밝히고, 친구 정대의 처참한 죽음을 떠올린다.

작품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그동안 ‘채식주의자’ 등 개인의 내밀함을 주로 다루던 한강이 사회적 이야기를 다뤘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계기로 그는 제주 4·3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등 역사적 사건에 천착하게 된다. “희생자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잔혹한 현실을 생생히 그려내 ‘증인 문학’이라는 장르에 접근한다”(한림원),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평가가 나온 이유다.

한강이 직접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 성인으로서 민주화를 거쳐온 작가들이 자신이 겪은 사건에 대해 마치 르포르타주처럼 생생한 묘사를 해왔다면 한강은 오히려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다룬다. 동호 외에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을 치료했으나 살아남아 치욕스러워하는 은숙, 아들을 잃고 죽을 때까지 괴로워하는 동호 어머니 등 다양한 인물을 통해 한 발자국 뒤에서 사건을 응시한다. 한림원이 “환영이 어른거리는 듯하면서도 간결한 스타일로 예상을 비껴간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의 모티브가 떠오른다”며 추켜세운 점이 납득된다.


작품을 읽다 보면 다른 한강 작품도 떠오른다. 예를 들어 은숙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불판 위에서 고기나 생선이 익어가는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 피를 흘리며 죽어갔던 시민군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프라이팬이 달궈지며 얼었던 눈동자에 물기가 맺히고, 벌어진 입에서 희끗한 진물이 흘러나오는 순간”에 대해 묘사하는 대목은 한강의 다른 대표작인 ‘채식주의자’를 생각나게 한다.

인간의 혼을 ‘새’로 바라보는 한강의 시각도 작품에 녹아 있어 흥미롭다. 작품에서 주인공 동호는 죽은 시민군의 몸에서 ‘새’가 빠져나갔다고 표현한다. “지금 상무관에 있는 사람들의 혼도 갑자기 새처럼 몸을 빠져나갔을까. 놀란 그 새들은 어디 있을까”라며 죽은 이에게도 혼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한강이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인 16일 발표한 짧은 산문 ‘깃털’에서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와 새를 비유하는 대목이 떠오르기도 한다.

“나에게 외할머니는 처음부터 흰 새의 깃털 같은 머리칼을 가진 분이었다. (중략) 유난히 흰 깃털을 가진 새를 볼 때, 스위치를 켠 것같이 심장 속 어둑한 방에 불이 들어올 때가 있다.”(‘깃털’ 중)

작품의 완성도는 높지만 읽기는 쉽지 않다. 시민군의 처참한 상황을 묘사한 표현들 때문이다. “발가락들은 외상이 없어 깨끗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생강 덩어리들처럼 굵고 거무스레해졌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같은 문장들을 읽다 보면 책장을 넘기는 일을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한강의 이런 가감 없는 표현은 폭력에 대한 고민을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해준다. 어떤 군인은 잔인하게 시민군을 진압했지만 진압을 망설인 군인도 있었다는 것. 인간의 폭력성은 광주민주화운동뿐 아니라 어느 때든 발현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설을 쓰기 전 어느 한겨울, 한강은 광주에 내려갔다고 한다. 한강은 광주에서 동호의 모티브가 된 소년이 살던 옛집에 방문했다. 소년의 형을 만나 꼭 제대로 써 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한강은 소년의 무덤도 찾았다. 소년의 흑백사진이 묘비에 붙어 있었다. 한강은 그 앳된 얼굴을 들여다봤다. 가방을 열고, 가지고 온 초를 태웠다. 기도하지도 묵념하지도 않았다. 눈에 묻힌 자신의 발목을 바라보다 돌아왔다. 이후 한강은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에 이렇게 썼다.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도심과 달리 이곳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얼어 있던 눈 더미가 하늘색 체육복 바지 밑단을 적시며 소년의 발목에 스민다. 그는 차가워하며 문득 고개를 돌린다. 나를 향해 웃는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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