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노벨 경제학상의 삼성전자에 대한 함의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은 아제모을루, 존슨, 로빈슨 등 세 명의 경제학자(이하 ‘AJR’)가 수상했다. 노벨상 위원회는 경제 및 정치 제도의 차이와 이런 제도의 지속성(persistence)이 국가의 번영과 국가 간 소득 격차의 지속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이들의 실증 및 이론 연구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사실 경제발전론과 역사학에서는 오랫동안 경제 발전의 심인(fundamental causes)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경제학에서는 경제성장을 흔히 자본축적, 인적자본축적, 기술진보 등으로 요인 분석을 한다. 그러나 이런 성장요인은 경제성장의 근인(proximate causes)이고 과정이다. 보다 근본적 질문은 왜, 언제, 어디서 이런 물적 또는 인적 자본의 축적과 기술진보가 발생하는가라는 것이다.
경제발전의 심인으로, 행운(luck)가설, 지리(geography)가설, 문화(culture)가설, 제도(institutions)가설 등이 그동안 제시되었으나, 사례 연구 중심으로 각론을박이 이어졌을 뿐이다. 그런데 AJR은 엄밀한 계량 분석을 통해 제도가설이 지지됨을 보임으로써 이 오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경제발전 연구 방법론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경제발전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그런데 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 AJR의 기여는 단지 경제발전론 분야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경제학에선 정부가 사회후생을 최대화하는 정책을 선택한다는 ‘사회적 계획자(social planner)’ 가정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정부가 이런 사회적 계획자라면, 제도의 차이와 또 착취적 제도를 포용적 제도로 변경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함에도 제도가 지속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다.
따라서 AJR의 더 큰 기여는 사회적 의사결정을 명시적으로 고려하는 정치경제학을 경제학의 주류로 다시 끌어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최근의 정치경제학은 그동안 경제학의 주류였던 ‘비규범적(positive)’ 경제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라는 의미의 정치경제학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서유럽 국가들과 서유럽 국가들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국가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수행한 AJR은 포용적 제도와 착취적 제도가 선택되는 것은 결국 정치제도에서 다원주의(pluralism)가 확립되고 경제제도에서 약자의 재산권이 보호되느냐에 달렸고, 착취적 제도에서 형성된 기득권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기술적 충격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제도의 변화가 용이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다.
최근 삼성전자의 위기가 입길에 오르고 있다. 삼성전자의 위기는 기술력에서 비롯된 것이고 답은 현장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AJR의 분석을 응용해 보면,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HBM 기술에서 뒤처지고 최첨단 시스템 반도체 생산 수율이 낮다는 기술적 문제는 삼성전자 위기의 근인이고 현상일 뿐이다. 삼성전자가 왜 HBM 기술개발을 중도에 포기했었는지 또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서 빅테크 기업들에 첨단 반도체 위탁생산 수주를 못 받고 있는지가 문제의 핵심이다.
결국 삼성전자 위기의 심인은 기술력이 아니라 이런 기술력 격차를 가져온 기업의 제도인 삼성전자의 소유지배구조이고, 이런 소유지배구조는 총수일가의 사익과 삼성전자 내부조직의 기득권에 의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메모리 반도체의 성공은 삼성전자 내부의 의사결정이 기업 내 최대의 기득권을 가진 사업부와 임원들 중심으로 이뤄지게 만들었고, 새로운 도전을 위한 과감한 변화보다는 점증적 변화나 과거 사례의 모방이 우선시되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여전히 있다. 그러나 이 기회의 창은 급속히 닫히고 있다. 지금이라도 시스템 반도체 설계 부문을 매각하고, 삼성전자 각 사업부문을 독립적인 회사들로 분사하고, 분사된 회사에 실권을 가진 세계 최고의 전문경영인을 영입해야 한다. 독립성과 재무적 책임성이 강화된 개별 회사가 생존을 위해 창조적 파괴라는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만 삼성전자가 노키아와 같은 몰락의 길을 피할 수 있다.
이런 분사와 국내에서 삼성전자가 RE100을 달성할 수 있는 구체적 전력수급 계획의 제시 없이는, 삼성전자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투자자들에게 확신을 줄 수 없다. 현 소유지배구조에서 온갖 사익을 누리는 이재용 회장 일가가 손에 쥐고 있는 눈앞의 이익에만 매몰된다면 결코 이런 변화의 결단을 내릴 수 없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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