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천의 21세기 진보] ‘진보의 경제성장’은 어떻게 가능한가

기자 2024. 10. 24. 21:0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잠재성장률이 역전됐다. 경제성장률은 경제 규모가 커지면 둔화하는 게 일반적이다. 2020년 기준,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4%였다. 미국은 1.9%였다. 2023년 처음으로 역전됐다. 미국은 2.1%, 한국은 2.0%였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같은 수치다.

사람들은 성장률이 낮아질수록 성장의 가치를 더 주목하게 된다. 성장은 고용과 직결되고, 고용은 소득과 직결된다. 자본주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성장률이 낮아지면 ‘내부 분배 투쟁’이 격화한다. 사회 갈등도 심해진다. 경제성장 그 자체가 중요한 이유다.

진보 쪽 일부에서는 ‘진보적’ 경제성장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다. 넓게 보면,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 실험도 같은 맥락이었다. 예컨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은 보수가 주도한 성장론이 ‘이윤주도’ 혹은 ‘자본주도’ 성장론이라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었다. 소득주도성장론의 내용적 실체가 임금주도성장론 혹은 노동주도성장론으로 귀결된 이유다.

한국 현대사에서 진보세력은 자신들의 경제노선을 갖고 있었다. 역사적 시기를 달리하며 3가지가 있었다. 첫째, 민족경제론이다. 1960~1970년대 진보의 주류 경제노선이었다. 민족경제론은 선진국과의 교역을 반대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4·19 이후 최대 규모 시위는 1964년 6·3사태였다. 일본과의 국교 수립을 반대하는 시위였다. 국교 수립의 반대 이유 중에는 ‘경제적 종속’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일본과 교역하면 다시 식민지가 된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민족경제론은 한국 진보세력만의 입장은 아니었다. ‘식민지 경험 있는 제3세계’ 국가들 대부분이 비슷했다. 수입대체 산업화, 종속이론, 내포적 공업화론으로 명칭은 달랐지만 내용은 비슷했다. 제3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식민지 트라우마는 그만큼 강력했다.

지난 60년, 진보의 경제노선 3가지

민족경제론의 반대편에 ‘박정희 경제학’이 있었다. 박정희 경제학은 오히려 제3세계에서 이단적 노선이었다. 외자 유치, 불균형 발전, 수출 노선, 대기업과 결합한 중화학공업 육성 등을 추진했다.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가 박정희 경제학과 유사한 선택을 했다. ‘동아시아 발전국가’로 불리는 모델이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경제학이 성공했다. 이후 중국의 덩샤오핑 역시 발전국가 모델을 채택했고,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게 된다.

둘째, 사회주의 경제학이다. 1980~1990년대 학생운동의 주류적 경제노선이었다. ‘1980년 광주 이후’ 학생운동은 급진화했다. 당시에는 전두환 군부독재와 미국이 관련됐다고 생각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의 상당 부분은 반독재, 반미, 반자본주의 입장을 갖게 된다. 이때 등장한 학생운동 흐름이 민족해방파(NL)와 민중민주파(PD)다.

사회주의 경제학은 상품과 시장, 이윤 추구, 자본, 자본가를 사라져야 할 존재로 봤다. 자본주의적 노동 착취의 기원으로 봤다. 강력한 국가 개입의 연장에서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추진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망했다. 각종 비효율이 드러났고, 민중의 저항으로 체제가 붕괴했다.

셋째, 사민주의 경제학이다. 2000~2010년대 한국 진보의 주류적 흐름이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유럽 복지국가는 나라마다 상이하다. 스웨덴, 독일, 영국, 프랑스가 다 다르다. 한국에서 수용된 사민주의 경제학은 케인스주의적 수요관리 정책에 대한 선호, 복지 확대, 노동조합과의 유대 강화였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에는 민족경제론과 사민주의 경제학의 사고방식이 혼재해 있었다. 그 흔적 중 하나가 기존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수출-대기업 중심’ 경제로 보며 ‘내수-중소기업’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소득주도성장론에 수출-대기업 지원 정책이 부재한 이유다.

진보의 4번째 경제노선 준비해야

1980~1990년대 진보 세력은 한국 경제를 ‘대외의존적 대기업 중심경제’라고 비판했다. 다르게 표현하면 수출중심-대기업 경제다. 그런데 이는 신흥공업국들이 한국에 대해 가장 부러워하는 지점이다. 동시에 오늘날 한국이 일본 경제를 추격 혹은 부분적으로 추월하게 된 핵심 동력이었다.

내수-중소기업의 역할 강조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양 날개’가 필요했다. 대기업-수출은 한국 경제를 선도했던 영역이고, 내수-중소기업은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을 위해 필요한 영역이다. 지금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올라감에 따라 중소기업의 수출지원 정책도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

지난 60여년간 진보의 경제노선을 복기해보면, 민족경제론과 사회주의 경제학은 실패가 입증됐다. 사민주의 경제학은 부분적으로는 성과가 있었지만, 한계 또한 커지고 있다.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지만, 최근 유럽 경제의 성장률과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진보적 경제성장론을 수립하는 과정은 두 가지 방법이 가능하다. 첫째, 진보적 가치관을 우선하고, 경제성장론을 모색하는 경우다. 이를테면 선(先) 이념, 후(後) 성장론이다. 둘째, 경제성장의 객관적인 원리를 찾아내고, 경제성장 원리의 테두리 내에서 진보적 가치를 녹여내는 경우다. 이를테면 선 성장론, 후 이념이다. 앞에서 살펴봤던 진보의 경제노선 60년 역사는 선 이념, 후 성장론에 가까웠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사민주의 이념을 우선했다. 그만큼 그 시절, 가슴이 뜨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진보의 네 번째 경제노선을 만들 때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경제성장의 원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탐구해야 한다. 경제성장 원리에 충실하되, 진보적 가치와 조화를 이루는 접근을 해야 한다. 선 성장론, 후 이념 방식이다.

정치를 통해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권력이다. 권력의 중립적 표현은 권한이다. 다른 하나는 꿈, 혹은 비전이다. 사나운 정치공학이 활개를 치는 시기, 누군가는 ‘진보적 경제성장’에 관한 정책공학을 준비해야 한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