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신호

이재훈 기자 2024. 10. 24.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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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다루는 언론 보도에 낯선 이름이 빈번하게 등장하면 그것은 명백한 이상 신호다.

선출되지 않은 비선 권력이나 정치 브로커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권력을 움직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걸 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결과를 마음대로 조작하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판세에 대해 확언하는 이들에게 정당이나 정치인이 휘둘리는 건 가치를 중심으로 구성된 결사체가 아니라 상대를 억눌러 이기는 데만 골몰하는 정략적 집합체가 한국 정치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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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한강 작가. 창비 제공

정치를 다루는 언론 보도에 낯선 이름이 빈번하게 등장하면 그것은 명백한 이상 신호다. 선출되지 않은 비선 권력이나 정치 브로커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권력을 움직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걸 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건희 여사 공천 개입 의혹’의 핵심 인물인 명태균씨도 이런 의심을 사고 있다. 명씨는 2022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윤석열 당시 후보의 자택을 셀 수 없이 방문해 여러 중요한 정치적 조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명씨는 윤석열 대선 캠프나 윤석열 대통령이 소속된 국민의힘에서 맡은 공식 직책이 없는 사람이다.

급기야 명씨 쪽이 공천을 대가로 뒷돈을 받아 대선 직전 윤석열 후보에게 보고하기 위한 여론조사를 매일 실시했고, 이 여론조사 중에는 윤석열 후보에게 유리한 결과를 조작하기 위해 표본을 3배 이상 ‘뻥튀기’한 것도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 공천 거래 의혹에는 2022년 6월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이례적으로 국민의힘 공천을 받아 당선된 국회의원도 연루돼 있다.(이번호 특집)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작가 한강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도 내재돼 있던 이상 신호를 드러내고 있다. 한강 작가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그의 책을 유해도서로 지정했던 보수 세력은 여전히 광주 5·18민주화운동과 제주 4·3, 페미니즘 등에 반지성주의적 폭력을 가하며 한강 작가의 작품을 폄훼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수상 소식 이후 평정심을 잃지 않고 현재진행형인 두 개의 전쟁을 거론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삶을 이어간 작가와 달리 개인사를 헤집거나 ‘가족 판타지’를 소재로 클릭 수 올리기에 급급한 보도, 출신 대학 동문과 지연 등을 앞세워 학벌과 인맥을 강조하는 보도들도 거듭 나왔다.

수상 소식 이후 엿새 만에 작가의 작품이 100만 부 가까이 팔렸다고 하지만, 이런 점들을 보면 등단 이후 30년 동안 국가폭력과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보편적인 폭력성’에 대해 “고요하지만 강렬하게” 저항해온 한강 작가의 작품 세계가 한국의 현실과는 아직 조응하지 못한 것 같다.(이번호 표지이야기)

여론조사 결과를 마음대로 조작하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판세에 대해 확언하는 이들에게 정당이나 정치인이 휘둘리는 건 가치를 중심으로 구성된 결사체가 아니라 상대를 억눌러 이기는 데만 골몰하는 정략적 집합체가 한국 정치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명씨를 보면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보수 여당이 이런 설명에 가장 부합하는 사례지만, 제1 야당도 이런 상황에서 그리 멀리 서 있지 않다.

폭력에 저항하는 작가의 글이 이뤄낸 결실을 빌미 삼아 속물적 행태를 보이는 이들이 곳곳에서 나타나는 것도 한국 사회가 문학을 통해 폭력과 양심의 문제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노벨문학상이라는 힘 숭배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보다는 더욱 다양한 한국 작가들의 문학으로 읽기의 세계를 확장하는 독자들이나 문학 작품 뒤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글을 쓰고, 다른 세계의 지적 유산을 소개하기 위해 번역에 몰두하며, 글을 묶어 편집하는 데 온 힘을 쏟는 이들의 노동이 주류가 되는 세상이 도래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한강 작가와 함께 설 수 있는 세상 아닐까. 한겨레21도 그런 세상을 앙망한다.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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