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자 ‘온지구’가 된 폭행피해자 A

한겨레21 2024. 10. 24.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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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너머n']가중처벌 가능성 연 ‘진주 편의점 폭행’ 항소심 선고
“여성이 온 지구 어디에서나 자유롭고 안전하길”
여성의당 경남도당 등 단체가 2024년 10월15일 오후 창원지방법원 앞에서 진주 편의점 여성혐오 폭행사건을 규탄하는 기자회견과 집회를 열고 행진하고 있다. 여성의당 제공

판결에서 ‘여성혐오’를 ‘비난받을 만한’ 범행 동기로 명시한 첫 번째 판례가 나왔다.

2024년 10월15일 창원지방법원 제1형사부(재판장 이주연)는 2023년 11월 경남 진주 편의점 ‘쇼트커트(짧은 머리) 여성 폭행 사건’ 피고인 선고공판에서 “피고인의 범행은 여성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와 편견에 기반한 것으로 비난받을 만한 범행 동기를 갖는다”고 판시했다. 범죄 판례를 분석한 내 경험에 비춰볼 때, 여성혐오를 범행 동기로 명시한 적은 몇 차례 있었지만 피고인을 가중처벌 할 수 있는 양형 사유로 재판부가 직접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현행법 체계 내에서도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가중처벌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법원 “여성혐오와 편견에 기반한 범행”

재판부는 피고인의 심신미약 주장을 일부 받아들였지만 “항소심 재판에서까지 ‘피해자가 먼저 남성혐오적인 언행을 하고 폭력을 행사했다’는 허위 주장을 반복한 것은 정신적인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진정으로 반성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심신미약을 인정하면서 유사 사건의 가해자들에게 ‘여성혐오가 선처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줬던 1심의 판단을 뒤집은 것이다. 물론, 양형을 감경하는 요소인 ‘심신미약’에 대해선 ‘심신미약이 없음을 증명하기에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검사에게 책임을 돌려 원심(1심)의 양형 판단을 유지한 한계는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재판부의 선고를 앞두고 창원지방법원 건너편에서 집회를 열고 행진하며 법정을 찾았던 사람들은 양형이 유지됐다는 아쉬움을 삭이며 이번 싸움의 의미를 되새겼다. 항소심부터 피해자 변호를 맡아 검찰에 공소장 변경을 요청하고(하지만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음), 범행 당시 심신미약 부존재, 양형에 대한 의견 등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던 이경하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가 마지막으로 이번 판결의 내용을 설명하며 피해자들과 연대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울컥하던 순간, 지난 1년 동안 피해자들과 함께 걸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일면식도 없던 피고인에게 ‘쇼트커트를 한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면 맞아도 된다”는 폭언을 들으며 맞았던 피해자 A, 그런 A가 ‘딸 같아서’ 서슴없이 돕기 위해 나섰다가 “같은 남자면서 왜 남자 편을 들지 않느냐”며 함께 맞은 또 다른 피해자 박아무개씨 등 피해자들이 그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됐던 그때, 진주성폭력피해상담소 소장(정윤정)이 나섰다. 여성 폭력의 지원 공백을 뚫고 직접 피해자들과 접촉한 뒤 법적, 경제적 지원 등을 시작하며 연대의 길을 만들었다.

검찰이 이 사건 피고인을 ‘성별에 기인한 혐오범죄’로 기소한 이후 재판에 대한 감시가 절실하던 때, 경남여성회 등 경남 지역 활동가들이 방청연대를 위해 법원으로 모였다. 2020년 하아무개의 스토킹살인사건 재판 방청연대를 통해 ‘스토킹 범죄 처벌법’ 법제화의 초석을 다졌던 그들이 이번엔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지켜보기 위해 법정을 찾았다. 지역 내 법원의 여성 대상 폭력 및 살인사건 재판을 꾸준히 모니터링하며 피해자를 지원하고, 수사·재판 전 과정을 감시하며 문제를 제기했던 그들의 활동은 서울 수도권 바깥 지역에서 사법감시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다.

여성의당 경남도당 등 단체가 2024년 10월15일 오후 창원지방법원 앞에서 진주 편의점 여성혐오 폭행사건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여성의당 제공

다른 피해자의 ‘그림자’ 된 피해자 A

정치권에서는 여성의당이 가장 먼저, 그리고 끝까지 피해자 곁을 지켰다. 기자회견, 정책 간담회, 방청연대 등에 함께하며 ‘여성혐오 범죄’ 의제를 부각하기 위해 애쓴 그들은 선거철에만 잠시 관심을 두다 거둬버리는 기성 정당의 행보와는 명확하게 차별화됐다. 여성의당 경남도당 비상대책위원장 정재흔씨는 가장 근거리에서 피해자와 소통하며 회복과 일상 재구성을 위해 노력했다. 피해자 개인의 회복과 일상 재구성을 위한 근거리 연대와, 이를 사회적 차원의 시스템 변화로 이어가려는 원거리 연대 모두 적절하게 해냈다.

그리고 피해자 A와 같은 ‘젊은 여성들’이 힘을 더했다. 최근 서울 혜화역에서 ‘딥페이크 성착취 엄벌 촉구 시위’를 6천여 명(주최 쪽 추산)의 시민과 성공리에 마무리했던 ‘여성혐오 규탄 공동행동’은 이 사건 관련 집회와 시위를 꾸준히 이어갔다. ‘경상도비혼여성공동체 위드(WITH)’ ‘여성주의 팀 화로’ ‘비혼호남여성모임 비호’ 등 전국 각지에서 여성혐오에 맞서 싸우는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싸움을 택한 피해자들의 뒤를 든든히 지켰다. 진주, 창원 등을 직접 찾아 매 공판 모니터링을 직접 하며 현장의 이야기를 담았던 기자들도 기록으로 지원했다. 당연히 나 같은 시민들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

의미 있는 연대의 길이 만들어졌더라도 피해자의 고통이 저절로 줄지는 않았다. 피해자 A와 박씨는 모두 일을 그만둬야 했고, 신체적·정신적 상해를 입어 병원 치료를 계속 받아야만 했다. 2심이 끝난 지금도 그들은 평범한 일상을 되찾지 못했다.(그나마 최근 피해자 박씨가 의상자로 지정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피해자들은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며 싸움을 이어나갔다. 복수의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의 경우 지난한 수사, 재판 과정을 거치며 피해자들끼리 반목하고 서로를 원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걱정이 기우였다는 듯 피해자들은 서로를 위했고, 결국 이 싸움이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졌다.

피해자가 피해자라는 위치에만 머물지 않았다. A로 자신을 소개하던 피해자는 어느 순간 연대자 ‘온지구’로 등장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만들어 본인의 사건을 알리던 그는 전국에서 발생한 다른 여성 대상 폭력 및 살인사건을 알리고, 각종 청원 참여를 독려하며 방청연대를 위해 법원을 찾았다. 혜화역 시위의 검은 길에도 그는 있었다. 사건 일지를 글로 남기면서 본인이 피해자가 된 사건의 의미를 직접 규정하기 위해 싸우던 그는 나아가 다른 피해자들의 그림자가 되려 했다. 현장에서 묵묵히 연대하는 모습을 목격하며 연대의 힘을 키우기 위해 더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재판이 끝나면 피해자, 연대자들과 파티를 한다. 싸움을 정리하는 자리는 연대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긴장을 풀고 일상적인 대화를 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평범한 그 일을 싸우는 도중에는 하기 어렵다. 주로 호스트 역할을 해왔던 나는 이 사건에서는 손님이 됐다. 강경민 진주성폭력피해상담소 대표의 초대를 받아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갔다. 가끔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바다를 앞에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그 밤이 부디 피해자와 연대자들에게 평온을 가져다주는 힘이 되길 바란다.

연대자 ‘온지구’의 소망

“저나 제 사건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연대의 목소리만큼은 특별했습니다. 아직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남았지만, 늘 그랬듯 지난 목소리를 떠올리며 다시금 용기 내어 살아보겠습니다. 이제는 저의 일상이 된 연대의 현장에서 꼭 다시 뵙기를 고대하며, 단지 여성이 여성으로서 ‘온 지구’ 어디에서나 자유롭고 안전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피해자 A, 연대자 온지구가 SNS에 남긴 말이다. 아직 그의 싸움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삶과 경험을 글로 풀어내는 젊은 여성 노동자인 그가 그의 바람대로 자유롭고 안전한 일상을 다시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의 연대자이자 그림자로서 같이 길을 찾고, 같이 걸을 것이다.

여성의당 경남도당 등 단체가 2024년 10월15일 오후 창원지방법원 앞에서 진주 편의점 여성혐오 폭행사건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여성의당 제공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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