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2024 최종심 후보 5인 소감 전문

황지윤 기자 2024. 10. 24.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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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5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서울 종로구 운니동 ‘송죽헌’에서 만나 최종심에 올릴 후보작 5편을 선정했습니다.

김기태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 김희선 장편소설 ‘247의 모든 것’(은행나무), 박지영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민음사), 서이제 소설집 ‘낮은 해상도로부터’(문학동네), 이주혜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창비) 등입니다. 이달 말 최종 심사를 거쳐, 올해 수상작을 선정하게 됩니다. 동인문학상 최종심에 출사표를 던진 다섯 소설가의 소감 전문을 싣습니다.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고운호 기자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나의 첫 소설집이다. 2022년 봄부터 2024년 봄까지 쓰고 발표한 아홉 편의 소설을 담았다. 대개 내 작은 거실에 있는 좌식 테이블에서 썼다. 자주 집 안을 서성거렸고, 가끔 기분 전환을 위해 근처 카페에 갔다. 천변을 오래 걸으며 엉뚱한 문장들을 떠올렸다. 내가 소설가인가. 어떤 때는 자연인으로서 썼고, 어떤 때는 직업인으로서 썼다. 애인이나 죄인이나 환자로서 쓴 소설들도 있다. 묶고 보니 갈팡질팡 비틀비틀이다.

대형마트를 걷다 보면 삶이란 끊임없이 진열된 상품들의 벽과 벽 사이를 배회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각자의 장바구니를 들고 서로 끈질기게도 타인인 채로 말이다. 그럼 소설은 사랑과 정의의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나. 소설에 그런 것을 꿈꾸어야 할 의무는 없다. 내게 그런 것을 논할 자격도 없다. 그래도 벽 너머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상상해보고 싶다. 만약 ‘좋은 세상’이라는 게 가능하다면, 그것은 아는 사람에게 쏟는 최대한의 애정보다 모르는 사람에게 품는 최소한의 애정에 달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진열대 끝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희선 ‘247의 모든 것’

/이태경 기자

동인문학상 최종심 후보에 오른 소감이라면... 제 책이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갈 기회가 되겠구나, 싶은 기대감이 생겼다고 말씀드리는 게 좋겠군요.

‘247의 모든 것’은 질병에 대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모두가 묵인했던 어떤 거대한 억압, 폭력에 대한 소설입니다. 단지 바이러스에 감염됐거나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때(코비드19 팬데믹 시절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 같이 그 행위에 동참했지요. 저 역시 거기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소설을 처음 구상하게 된 것은 코로나 팬데믹 초기, 슈퍼전파자 사건을 목격한 뒤입니다. 당시 모든 언론이 그의 사생활을 파헤치고, 정부는 그를 죄인처럼 다루었으며, 그가 속한 종교집단은 악마화되었지요. 과거에는 사상이나 이념을 통해 공포와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통제와 억압이 행해졌다면, 어쩌면 앞으로는 질병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긴, 이미 코로나 팬데믹 때 그런 전조를 똑똑히 확인하기도 했지만요. 우리는 감염의 위험을 막겠다는 이유만으로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격리하여 건물 안에 가두었고, 그들은 그 안에서 꼼짝없이 죽어갔습니다.

이 모든 이들, 질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인권을 짓밟힌 사람들, 코호트 격리된 채 죽어간 환자들, 저는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 ‘247의 모든 것’을 썼습니다. 그 사람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자들이었고, 그렇기에 제가 대신 말하고 싶었지요. (책 말미에도 적었듯이) ‘보이지 않는 묘비’를 세우는 심정으로요.

박지영 ‘이달의 이웃비’

/고운호 기자

아주 오래전 새벽 첫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이 든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사람 없는 한적한 거리를 느릿느릿 걸으며 쓰레기를 줍는 노인을 보았다. 나는 왜인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십여 년이 흐른 뒤에야 그것은 ‘이달의 이웃비’라는 소설이 되었다. 왜 어떤 장면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각인되어, 꼭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을 거는 걸까. 그건 나의 의지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가 가진 힘일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야기가 전해져야 할 곳에 제대로 전달되도록 라디오의 주파수를 조금 더 정확히 맞추거나 볼륨을 높이는 일 같은 것.

오래 글을 쓰지 않거나 못 썼던 날들이 있고, 그런 날들 중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는 목소리가, 풍경이, 사람이 있었다. 내가 쓰지 않으면 이미 내 안에서 개별성을 띈 이 인물들은 다 어디로 가나, 그런 빚진 마음들, 그냥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은 이웃들이 있어서 나는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이 소설집을 엮으며, 종종 묻곤 했다. 나는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지, 내 소설이 궁극적으로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지위랄지, 그런 게 있다면 무엇인지. 내가 찾은 답은 ‘이웃’이었다. 내가 글 쓰는 사람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큰 영예이자 내 소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귀한 이름. 때로는 불편한 소음이지만 때로는 따뜻한 기척이기도 한 이름.

눈을 들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다른 책들이 기울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주는 책들이 보인다. 그런 책과 책 사이에 내 책도 있다. 내 책 역시 그저 제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다른 책이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참 좋지 않나,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며 이웃 분들의 감상도 찾아 읽었다. 공들여 읽고 소설 속 인물들에 곁을 내주는 그 겹겹의 다정함에 나는 또다시 이웃비를 빚지고 만다. 더 많이 빚지고 갚으면서,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용기로 부끄러운 채 오래 써나가겠습니다.

서이제 ‘낮은 해상도로부터’

/이태경 기자

어릴 적에 텔레비전 가까이 다가갔다가 우연히 작은 네모 칸을 발견했다. 그때 나는 커다란 텔레비전 화면이 무수히 작은 네모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작은 네모 칸에서는 빨강, 파랑, 초록의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빛에 단박에 매료되었다. 나는 그 빛에 최대한 가까이 닿고 싶었다. 그래서 텔레비전 유리판에 뺨을 댄 채, 오래도록 그 빛을 바라보았다. 그 번쩍임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훗날, 그것이 디지털 이미지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픽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껏 나는 디지털 이미지를 통해 실제로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을 보았다. 배우나 가수, 극 중 인물들에게 깊은 애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나는 내가 아는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그리워할 수 있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또 지금껏 나는 디지털 이미지를 통해,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보았고 이미 지나간 전쟁을 보았다.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장면 보았다. 자연재해와 기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았다. 수많은 국가적 참사를 보았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마주했고, 그 잔상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그 당시 느꼈던 공포와 분노, 무력감과 슬픔은 내 안에 깊이 새겨졌다. 나는 나의 기억의 일부가 디지털 이미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내면과 감정이 낮은 해상도로부터 왔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 소설집은 디지털과 복제 기술에 대해 탐구하기 위해 집필되었다. 나는 현시대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디지털과 복제 기술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의 감각 또한 변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술과 협력하여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고, 또 내 눈앞에 현전하는 문장이 디지털 정보 값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했다.

아날로그 필름으로 촬영된 이미지는 재현의 차원에서 존재하지만, 디지털 이미지는 세계의 모든 것을 정보 값으로 치환한다. 그러므로 디지털 이미지는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해야 할 또 다른 현실이다. 디지털은 공간을 확장하고 시간을 축소한다. 또한 효율성과 경제성을 좇는다. 그것은 언제나 왜곡과 변형의 위험성을 내포한다. 무엇인 진짜이고 가짜인지 명확히 구분해낼 수 없는 세계다. 이런 세계에서 무엇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디지털 기술의 속성을 밝히고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학과 예술이 진실을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으로 이 소설집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주혜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고운호 기자

봄이 올 때마다, 꽃이 필 때마다 우울해지는 이유를 내게 물었다. 봄의 회귀는 어김없이 반가운 이치일진대 왜 나는 봄마다 나만 초대받지 못한 잔치를 엿보는 사람처럼 무참해지고 마는가? 그 불편함, 서러움, 억울함의 연원을 따져보다 1980년 봄에 이르렀고, 열 살이 되자마자 빛이 가득한 집과 유일하게 기댈 곳이었던 노래까지 빼앗긴 여자아이 시옷을 만났다. 시옷은 태어나자마자 여성이 아니라 ‘남성 아님’, 딸이 아니라 ‘아들 아님’의 기호를 부여받은 아이다. ‘여자아이는 어떻게 여자아이가 되는가’라는 큰 질문을 내게 던져놓고 그에 관한 대답으로 ‘남자아이로 오해받으며 그 비밀의 혜택을 즐기다 여자아이임이 드러난 순간 더러운 사람이 되고만 아이’에 대해 썼다. ‘남성 아님’이었던 아이는 ‘여성임’이 드러나면서 곧바로 흙바닥을 뒹굴며 울어야 했다. 아이는 끝내 ‘고향의 봄’을 부르지 못했는데, 처음부터 고향이 없었으므로, 봄에 초대받지 못했으므로 당연한 귀결이었다.

학살자의 무책임한 죽음을 목격한 날 소설의 첫 문장을 떠올렸다. 80년의 봄, 꽃처럼 터져 나왔던 전국의 아우성과 꽃처럼 저버린 광주의 목숨들이 찾아와 내 곁을 어른거렸고, 봄에 대해 꽃에 대해 쓰다가 결국 “꽃이 진 게 꽃의 잘못은 아니잖아요?”라는 무기력한 한마디에 도달했다. 참으로 나약하고 미약한 문장이지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라도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들이 진 것은 결코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미국의 여성 시인 뮤리얼 루카이저는 썼다.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학살자로부터, 성범죄로 가정을 파괴한 남편으로부터 제대로 사과받지 못해 ‘화병’이 난 중년여성 ‘나’의 일기에서, 그 일기가 끄집어낸 열 살의 시옷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 성냥불이 옮겨붙듯 독자들 저마다의 이야기로 연결된다면 세상이 터져버리기 전에 내 마음이 벅차 터져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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