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정양환]왕후의 밥, 걸인의 찬

정양환 국제부 차장 2024. 10. 23.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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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가 이븐(even)하게 익었네."

얼마 전 식사 자리.

연배 지긋한 지인이 최신 유행어를 던질 줄이야.

괜스레 그날 나온 생선회도 이븐하게 싱싱한지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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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환 국제부 차장
“김치가 이븐(even)하게 익었네.”

깜짝 놀랐다. 얼마 전 식사 자리. 연배 지긋한 지인이 최신 유행어를 던질 줄이야. 넷플릭스 ‘흑백요리사’가 인기긴 했던 모양이다. 요리 예능이 이리도 남녀노소 입에 오르내리다니. 괜스레 그날 나온 생선회도 이븐하게 싱싱한지 곱씹었다.

태평양 건너 미국도 요즘 음식으로 화제 만발인 이가 있다. 이른바 ‘길거리 요리 감별사’ 키스 리(Keith Lee)란 흑인 청년이다.

미국 인플루언서 키스 리가 지난해 말 뉴욕에서 소셜미디어에 올린 음식 평가 영상. 사진 출처 키스 리 인스타그램
올해 미 대선 경합주 중 하나인 미시간주 출신인 그는 스물일곱 살. 하지만 틱톡 팔로어만 1800만 명이 넘을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하다. 레게 머리를 한 그가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세우면, 다음 날 식당은 수백 명씩 줄을 선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리가 호평한 음식점은 매출이 평균 900%나 늘어난다.

한데 그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평가 영상들은 낯설다 못해 황당하다. 일단 동네 어디나 있음 직한 소탈한 식당을 간다. 가볍게 인사 몇 마디 건네다가 주문한다. 근데 식당에선 먹질 않고 꼭 포장해 나온다. 그대로 차에 탄 뒤 음식을 꺼내 한 입 베어 문다. 그러곤 별 묘사도 없이 맘에 드네 마네 하다가 점수를 매긴다. “10점 만점에 몇 점.”

요식업계는 충격을 넘어 몸서리를 쳤다. 정당한 채점이 아니란 항변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음식 비평은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이다. 한 호텔 체인 관계자는 롤링스톤스에 “관련 분야에 종사했거나 학교를 나온 뒤 몇 년 이상 글을 실어야 ‘평론가(critic)’ 권위를 인정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웬 ‘듣보잡’이 생태계를 파괴하니 공분이 치솟았다.

리가 요리에 뿌리가 없다는 건 맞는 말이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가 감옥에 간 뒤 학교를 6번 옮겨 다닌 문제아였다. 고교 시절 레슬링에 입문해 마음을 잡고서 프로로 데뷔한 종합격투기 선수다. 그러다 ‘카메라 울렁증’을 이겨보겠다고 소셜미디어에 영상을 올린 게 인생을 뒤바꿨다. 팬데믹 시절 경기가 끊겨 배달 일을 했던 경험을 녹인 지금 방식의 음식 평가가 대박이 났다.

사람들이 열광한 건 바로 이 대목이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칼질하는 게 아니라, 자동차에 끼어 앉아 무표정하게 우걱우걱 끼니를 때우는 모습. 그게 우리네 처지랑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었다. 갈수록 비싸지는 팁 탓에 식당에 앉기조차 부담스러운 주머니 사정도 그렇다. 그의 영상에 달린 상당수 댓글은 “나도 맨날 저렇게 먹는데”였다. 게다가 리가 주로 유색인종 가족이 꾸려가는 영세 식당 위주로 가는 게 알려지며 호감이 더 커졌다.

물론 리의 방식을 무조건 편들 순 없다. 음식 따라 먹는 법이 다르건만 자기 스타일만 고수하는 건 문제다. 요리의 일관성이나 서비스도 중요한데, 한 입 먹고 단정 짓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야후뉴스에 따르면 지난해 박하게 평가받은 몇몇 식당들은 경영에 곤란을 겪고 있다. 그도 이젠 왕관의 무게를 깨우쳐야 한다.

하지만 그가 다시금 일깨운 진리도 명확하다. 맛있는 건 어찌 먹어도 맛있다. 비싸고 화려한 음식이 항상 좋은 것도 아니다. 흑백요리사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우리는 누구나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일지언정 즐겁게 먹은 기억이 있다. 그건 정성 혹은 공감이 주는 힘이다. 맛이란 각자가 정하는 가치일테니. 행복은 내 혀 끝에 달렸다.

정양환 국제부 차장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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