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범람-낙상, 서울의 걱정거리”… 격론 끝 “덮어씌우자” 복개공사[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2024. 10. 23.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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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에 버려지는 오물-배설물 문제… 천변 길 좁아 떨어지는 사고도 잦아
예산 부족을 이유로 정비 미뤄지자, “다수 이용자인 조선인 차별” 논란도
1935년 “철근콩크리트 덮겠다” 발표… 사업 순위 또 밀려 1937년에야 착공
청계천은 오수와 빗물을 조선 도성 밖으로 배출하는 간선 하수도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는 잦은 낙상 사고와 범람으로 정비 문제를 둘러싸고 일제강점기에 논란이 계속됐다. 1910년경의 청계천.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20년대부터 청계천 정비 갑론을박

청계천은 조선 건국기 한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도성 중앙의 시냇물을 더 파고 넓혀서 조성한 하천이다. 전통적으로 도성의 남북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면서 더러운 물과 빗물을 모아 성 밖으로 배출하는 간선 하수도 역할을 했다. 또 평소에는 메말랐다가 홍수 때는 범람하기 일쑤였다. 청계천은 한양의 도시 기능상 꼭 필요한 요소이면서 도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 관리와 정비는 늘 중요한 과제였다. 일제강점기에도 이 점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병합 초기 일제는 청계천 정비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총독부 기관지도 “근래에 와서는 다른 것은 모두 혁신이 되고 문명이 되어 오지마는 한갓 간천 같은 것은 손을 대일 생각을 아니했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매일신보·1919년 5월 17일)》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청계천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되었다. 그 하나는 하천에 무분별하게 버려지는 오물과 배설물로 인한 위생 문제였으며, 다른 하나는 천변 양측의 길 너비가 너무 좁아 사고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문제였다. 1924년 4월에는 “광화문우편국 집배인 고영복이란 사람이 우편물을 가지고 자전차를 타고 부내 관철동 39번지 앞 청계천변 길을 지나가는데 그때에 마침 부내 송현동 11번지 박희선이가 하차(荷車·수레)에 짐을 싣고 그 반대로 옴으로 그것을 피하려 하다가 자전차를 탄 채로 청계천에 떨어져서 자전차가 부스러지고 면상과 발에 중상을 당하고 뇌진탕이 일어나서 인사불성에 이르렀다.”(매일신보·1924년 4월 23일) 이런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청계천 문제는 경성부회(지방의회) 회의에서도 늘 시끄러운 소재가 되었다. 1926년 회의 기록을 보면 “청계천 양편 길에 대하여 다른 곳을 말하면 도로가 좀 불완전하야 교통이 불편할 뿐이지만 이곳은 전혀 한 사람도 다닐 수 없을 뿐 아니라 여러 길이나 되는 청계천가이므로 어린아이들이 장난을 하다가 개천에 떨어져 부상 당하는 일도 종종 있으며 술 취한 사람들이 때때로 낙상하는 일이 많은데 이에 대해 어찌하겠느냐”는 의원의 공박에 경성부 토목과 관리는 “그곳은 극히 위험한 곳인 줄 아나 경비가 없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대답한다. 이에 “경비가 없다는 데는 다시 할 말이 없어서 부득이 입을 다물게 된 의원 측으로부터는 당국이 너무도 다른 도로를 미장하기에만 몰두하고 각일각으로 위험을 느끼게 되는 이곳에 경비 없다는 당황스러운 이유만 내세우는 데 대하야 불평의 기운이 충만했다.”(매일신보·1926년 3월 5일)

여름 홍수로 범람한 청계천 모습(매일신보 1918년 8월 17일자).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1920년대 예산 부족으로 도시 정비 사업이 부진한 것은 청계천뿐만 아니라 경성 곳곳이 비슷했다. 아니, 전국 도시 어디나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청계천은 공교롭게도 조선인 중심지인 북촌과 일본인 중심지인 남촌의 경계선이었으며, 천변 도로 이용자의 다수는 조선인이었다. 따라서 청계천 정비의 부진은 다른 곳과 대비되어 경성의 남북 차별, 곧 민족 차별 문제로 비화하곤 했다. “부민 간에는 이것이 남촌에 있었으면 이미 개수하여 안전히 했을 것이다. 북촌에 있는 까닭으로 아직까지 방치하고 있다는 말까지 훤전(喧傳·소문이 퍼짐)되는 중으로 인심까지 험악화하야 가는 형편”이었던 것이다.(매일신보·1929년 11월 25일)

1931년에는 경성부가 “비가 오면 질어서 사람이 괴로워 다닐 수 없다는 이유”로 용산 한강통 도로 포장 예산 4만 원을 부회에 올리자 “부당국자의 처사가 불공평한 것을 비난하는 동시에 의원 간에도 이에 대한 불평이 높아 이번에 열리는 부회에서는 청계천 문제로 일대 파란”이 일어났다.(매일신보·1931년 3월 12일) 겨우 도로가 질다는 이유로 한강통은 포장까지 하면서 낙상 사고가 빈발하는 청계천은 정비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청계천 정비는 예산이 너무 많이 소요돼 당장 시작하기 어렵다는 경성부 토목과장의 답변에 대해 “만약 청계천이 황금정 이남 남촌에 있다고 하면 부당국자는 어떻게든지 이미 처단했을 것”이라는 조선인 의원의 반발은 늘 반복되는 논란의 구도를 보여준다.(매일신보·1931년 3월 14일)

청계천을 ‘서울의 걱정거리’ ‘살인도로’라고 명명한 신문기사(매일신보 1932년 6월 17일자). 당시 청계천의 정비가 얼마나 중요한 현안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비슷한 양상으로 반복되던 청계천 정비 논란은 1934년 총독부가 ‘조선시가지계획령’을 제정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조선에서 ‘법정 도시계획’을 실시할 수 있게 되면서 도시 개발이나 정비에 대규모 예산 투입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는 십수 년 경성의 골칫거리였던 청계천 정비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다. 1935년 경성부는 “종래 도시의 미관상 또는 부민의 위생상 중대 문제로 그 대책을 강구하여 오던 청계천의 정리에 나서기로 하였다. 청계천의 간선으로 합류되는 부내 삼청동에서 의전 병원(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앞을 거쳐서 광화문우편국 앞을 지나가는 청계천의 지선을 비롯하야 다옥정(茶屋町·현재 중구 다동) 남측을 관통하는 청계천의 지선 등등을 일괄하야 모두 그 위를 철근콩크리트로 덮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계천의 좌우 양편에 역시 일부를 철근 세멘 콩크리트로 덮어 양편의 길을 넓히는 동시에 장래 오물물을 버리는 암랑(巖廊·하수도)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동아일보·1935년 5월 30일) 경성부의 계획은 청계천의 복개, 도로화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안전과 위생,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전부터 시중의 여론이 바라는 바였다.

그런데 막상 경성시가지계획이 시작되자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경성부가 남산주회도로 부설을 추진하면서 청계천 복개가 예산 투입에서 계속 후순위로 밀린 것이다. 남산주회도로는 신용산 삼각지에서 신당동에 이르는 도로이다. (현재 이태원로) 경성부는 도시계획 추진을 기회로 남산주회도로를 부설하고 그 남쪽 이태원, 한남동 일대의 경성부 소유 토지를 고급 주택지로 개발하고자 했다. 경성부 재정에 도움이 되고 (주로 일본인일 가능성이 높은) 상류층이 원하는 사업이었지만 서민 다수의 이해관계와는 큰 상관이 없는 사업인 셈이다.

부회 회의에서는 격한 논쟁이 이어졌다. 한 조선인 의원이 청계천 복개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남산주회도로 부설을 “75만 원이나 들여 공사 착수하는 반면 10여 년이나 문제가 되어 온 청계천을 방임하는 것이 과연 말이나 되는가? 그것은 청계천이 북쪽에 있는 까닭이 아닌가?”라는 민감한 발언을 쏟아내자, 일본인 의원이 “청계천 문제는 연일 충분히 이야기되어 더 이상 질문의 여지도 없다. 그런데도 계속 남산주회도로와 연결하여 대립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조선인 의원 측의 편협한 감정의 발작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반박하고, 다시 “감정의 발작이라는 말을 취소하라. 우리들은 모두 부민을 위한 부정을 논하는 것인데, 감정이란 무엇이냐? 조선인 의원을 모욕하는 말”이라는 재반박이 이어졌다.(국가기록원 소장 1936년 3월 경성부회 회의록에서 재구성)

논란은 ‘사회적 압력’의 효과를 발휘한 듯하다. 1937년 정식으로 시작된 경성시가지계획의 우선 사업 중 하나로 청계천 복개와 도로 부설이 포함됐다. 물론 청계천 전체의 복개는 “40년 후의 아득한 일”이므로 최초의 복개 계획 구간은 광화문에서 삼각동까지 정도였다. 그나마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 도시계획 같은 데 투입되는 예산은 계속 축소됐으며 자재난도 심각했다. 8·15 광복 때까지 청계천은 서린동 구간, 즉 광화문에서 현재 종각역 정도까지 복개하는 데 그쳤다.

일제강점기 ‘복개’는 공론화된 청계천 문제의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도시 정비에 투입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은 한정돼 있었고, 그 배분을 둘러싼 경합은 늘 치열했다. 그리고 종종 그것은 ‘민족적 갈등’으로 폭발하곤 했다. 이것이 ‘식민지 수도’ 경성의 현실이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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