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역지사지의 달인이 되자

기자 2024. 10. 23.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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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철이 다가온다. 사학과를 지망한 학생들에게 “왜 역사공부를 하려고 하나요?”라고 묻는 경우가 있다. 다는 아니지만 이렇게 답하는 학생이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는 선봉에 서고 싶습니다.” 거대야당이 추진하려고 한다는 역사왜곡처벌법에 이 학생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또 이렇게 답하는 학생들도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해서 역사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불변의 역사적 진리를 탐구하고 싶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역사의 정의를 세우고 싶습니다”. 이들의 표정은 자못 비장하며, 어조는 확신에 차 있다.

바로 이 ‘확신’이 문제다. 이 학생들의 발언, 표정, 어조는 사학(史學)이 아니라 종교 혹은 경학(經學)에 어울리는 것들이다. 내 주변 교수님들 중 부인에게 이끌려 교회에 나가는 분들이 간혹 있다. 어떤 분들은 목사님 설교에 논리의 비약과 사실인지 의심되는 점들이 보여 집중이 안 된다고 푸념하곤 한다. 교회는 믿어서 가는 것이지 분석·검증하러 가는 게 아니다. 죽은 사람이 사흘 만에 부활했고, 처녀가 애를 낳았다는 말씀은 신앙의 대상이지 시시비비 대상이 아니다. 그러니 딴생각 말고 경청해야 한다. 그러나 대학은 교회가 아니다. 사학과는 신념이 아닌, 회의(懷疑) 장이다.

성리학 같은 경학은 절대적 규범, 불변의 진리를 상정(想定)하고 그걸 탐구, 실천하는 분야다. 반대로 역사학은 세상과 인간사의 끊임없는 변화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말고 모든 것은 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역사학이다. 그러니 위의 학생이 탐구하고 싶다는 ‘불변의 역사적 진리’는 적어도 사학과에서는 배울 수 없다.

역사학은 사실의 학문인 만큼이나 해석의 학문이기도 하다. 사료에 철저히 기반한다는 엄정한 룰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다양한 해석을 할 자유를 부여하는 학문이다. 내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자못 멋지게 들리는 말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저 ‘역사’는 미리 하나로 정해져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저 ‘역사’와 다른 다양한 역사상을 제시할 자유를 허락해줄지 걱정이 되어서다. ‘역사의 정의’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자명한 것이니 ‘탐구’할 필요는 없고 ‘세우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는 않을까 우려되어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역사학은 확신과 신념이 아니라 ‘회의(懷疑)’의 학문이다. 확고하다고 생각해왔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가르쳐주는 분야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이 특정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특정한 시기에 형성된 것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것도 결국 변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역사를 좋아하고 공부하는 사람 중에는 자신의 생각을 회의할 준비가 전혀 안 돼 있고, 오히려 역사에서 그 생각의 ‘정당성’을 보증받는 데 몰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러려면 그냥 그렇게 ‘믿으면’ 되지, 굳이 어려운 역사를 공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지만 주로 과거가 말하게 해야지 현재의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해서는 곤란하다. 과거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과거엔 실로 온몸에 땀과 흙, 혹은 피가 묻은 이들이 가득 차 있다. 역사 속에서 살아온 인간들은 구름 위 존재들이 아니라, 땅바닥을 박박 기어온 사람들이다. 100% 완전무결한 사람들이 아니다. 아니 10%만이라도 평가해줄 구석이 있다면 대단한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 역사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선 안 된다. 그렇게라도 살아낸 것에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해심을 갖고 대해야 한다. 항상 내가 저 시대, 저 형편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자문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대하는 사람들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달인이어야 한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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