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중환의 진화의 창]왜 애꿎은 이에게 울분을 터뜨릴까

기자 2024. 10. 23.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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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을 상상해 보자. 업무 중이던 당신은 잠시 휴게실에서 쉬고 있다. 마침, 당신의 친구인 순자가 휴게실에 들어왔다. 당신과 순자, 그리고 정숙은 회사에 함께 입사해서 돈독한 우정을 쌓아왔다. 순자는 한숨을 푹 쉬면서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나 지금 너무 답답하고 짜증이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당신은 순자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순자가 답한다. “어젯밤에 정숙이랑 식당에서 함께 저녁 먹으면서 다음 프로젝트를 구상하기로 했거든. 그런데 얘가 약속시간 10분 전에 덜렁 문자로 날 바람맞힌 거야. 나 식당에서 혼자서 밥 먹었다니까. 사실 정숙이가 좀 자기만 생각하잖아. 그래도 자기가 귀찮다고 약속을 맘대로 취소할 줄은 몰랐어. 하아, 걔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순자의 절절한 하소연을 들은 당신은 어떤 심정이 드는가?

화자가 어떤 대상에 대한 울분을 제삼자(대개 화자와 대상을 다 아는 사람)에게 터뜨리는 일은 아주 흔하다. 왜 사람들은 자신을 화나게 한 장본인에게 가서 따지는 게 아니라 엉뚱한 사람을 붙잡고 화풀이할까? 이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1세기가 넘도록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프로이트를 따르면, 마음은 증기 엔진과 같다. 마음속의 분노가 제때 배출되지 못하고 꾹꾹 쌓이면 언젠가 폭발한다. 따라서 제삼자에게 부정적 감정을 털어놓는 행위는 화자의 분노를 줄이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여러 실증 연구는 제삼자를 향한 화풀이가 화를 가라앉히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발견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화를 더 부채질하기만 했다. 당장 여러분께서 어떤 친구로부터 험한 꼴을 당한 다음에 다른 친구를 찾아가 하소연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시라. 원인을 제공한 친구에 대한 분노가 싹 사라지던가?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진화심리학자 제이미 크렘스와 그 동료들은 ‘진화와 인간 행동’ 학술지에 실린 논문에서 우리가 제삼자에게 감정을 터뜨리는 진화적 이유는 친구 간의 경쟁 때문이라고 제안했다. 인류의 진화 역사에서 동성 친구들 사이에 자신의 든든한 우군을 되도록 많이 확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생각해 보시라. 먼 과거의 수렵·채집 사회에서 사고, 질병, 상해 등을 당했을 때 즉시 위로금을 지급해주는 보험사는 없었다. 절친한 친구는 어려울 때나 좋을 때나 정서적 혹은 물질적으로 큰 버팀목이 된다는 사실이 인간뿐만 아니라 몇몇 영장류 종에서도 밝혀졌다. ‘친구 좋다는 게 뭐야?’라는 말은 ‘친구는 도우라고 있는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친구들 사이에서 크게 호감을 끄는 ‘인싸’가 되는 것이 관건이라면, 어떤 전술을 구사해야 할까? 대상이 없는 자리에서 그를 노골적으로 헐뜯고 비방하는 전술이 먼저 떠오른다. 화자가 대상을 뒤에서 중상모략하면, 듣는 이는 대상에 대한 호감이 떨어지고 화자에 대한 호감은 높아지게 된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 전술은 위험하다. 듣는 이가 이렇게 생각하기 십상이다. ‘어머, 얘 다른 데 가서는 이렇게 내 욕을 하고 다닐 거 아냐.’ 즉 대놓고 뒤에서 비방하는 전술은 듣는 이의 화자에 대한 호감이 오히려 떨어지게 할 수 있다.

크렘스는 화자가 듣는 이에게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분출하는 전술은 이러한 역효과를 방지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묘책이라고 주장한다. 대상에 대한 나쁜 정보는 고스란히 다 전달하면서, 화자가 입은 피해에 집중해 화자가 너무 공격적이고 막 나간다는 느낌은 주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여성 참여자들에게 순자의 절절한 하소연이 담긴 시나리오를 읽게 하고, 순자와 정숙 중에 누구에게 더 호감이 가는지 물었다. 예측대로 참여자들은 정숙보다 순자가 더 좋다고 답했다. 비교를 위해, 대조 집단에 배정된 여성 참여자들에게는 순자가 정숙을 뒤에서 대놓고 비방하는 시나리오를 읽게 했다. 이 경우에는 순자에 대한 호감도와 정숙에 대한 호감도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요약하자. 최근의 연구를 따르면, 친구 집단 내에서 화자가 어떤 대상에 대한 울분을 누군가에게 터뜨리는 행동은 그가 대상보다 화자를 더 가까운 친구로 여기게끔 만들려는 전술이다. 이 가설은 동성 친구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부부 등 다른 관계에서 벌어지는 감정 배출에 대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상처받아 속상한 마음을 내게 토로하는 친구는 실은 내가 그 사람보다 자신을 더 좋아하게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 중이라는 가설은 왠지 미소를 머금게 한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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