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식당 못 들어가” vs “꾸준히 개선”… ‘장애인 접근권’ 대법 공개변론

이선목 기자 2024. 10. 23.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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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직도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음식점을 찾아다닙니다. 얼마 전 점심 먹으러 돌아다니는데 30분을 헤매다 한 곳도 발견하지 못해 그날 점심을 굶고 회의에 들어갔습니다. 며칠 전에는 지인을 만나 카페를 가려고 1시간 동안 헤맸지만 찾지 못해 길에서 얘기하고 헤어져야 했습니다.” (배융호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

조희대 대법원장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차별구제 청구 등 소송 상고심 사건에 대한 공개 변론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숙연 대법관)가 23일 오후 2시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A씨 등 3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차별구제 청구 소송 상고심 사건에 대한 공개 변론을 진행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공개 변론이 진행된 것은 조희대 대법원장이 취임한 후 처음으로, 2021년 이후 3년 만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원장, 대법관 12명 등 총 13명이 함께 재판하는 방식. 기존 판례를 뒤집거나 새로운 판례를 만들어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날 휠체어를 탄 채 원고 측 참고인으로 나선 배융호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는 “장애인 등 편의법은 장애인의 편의 증진을 위해 제정됐지만 제정 취지에 맞지 않아 수많은 소매점들이 의무대상에서 제외됐고, 그 결과 장애인의 일상생활이 어려워졌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장애인등편의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지체장애인을 위한 편의제공 의무를 부담하는 소규모 소매점의 범위를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에 위임하고 있다. 1998년 제정된 구(舊)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은 바닥 면적이 300㎡(약 90평) 미만인 소규모 점포는 장애인 출입로, 호출벨 등 지체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을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 시행령 조항에 따라 2019년 기준 전국 편의점의 약 97%가 장애인을 위한 편의 제공 의무에서 면제됐다. 이에 원고들은 “국가가 시행령을 20년 넘게 개정하지 않아 장애인 등 편의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보장한 접근권이 제한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 사건의 쟁점은 국가가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소규모 매장에 부여하지 않은 시행령을 장기간 개정하지 않은 것이 위법인지, 국가가 시행령 개정을 미룬 것이 위법하다면, 국가배상 책임이 성립되는지 여부다.

앞서 1심과 2심은 “편의점이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해야 한다”면서도 국가배상 책임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당시 재판부는 “국가가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은 것이 위법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고의나 과실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다만 해당 시행령은 2심 재판 중인 2022년 4월 개정돼, ‘바닥 면적 50㎡(약 15평) 이상 점포’의 경우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가 의무화됐다.

이날 원고 측 대리인은 “전국 편의점의 편의시설 설치율이 0.35%에 불과하고, 26차례 실태조사에서 소규모 시설이 단 한 번도 포함되지 않았다”며 “일반 시행령 개정에 5~7개월이 걸리는데 이 규정은 24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이에 피고 측 대리인은 “법령이나 법률 문헌상 (피고에게) 작위 의무가 인정되기는 어려워 보이고, 국가인권위 권고 이후 시행령 개정 절차를 했다는 점에서 (입법 부작위의) 근거가 될 수 없다”며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에게는는) 온라인 구매나 대형마트 이용, 활동보조사 통한 구매 등 대체 수단이 있고, 정부로선 소상공인의 경제적 부담도 고려해야 해 점진적 접근이 필요했다”고 반박했다.

또 피고 측 참고인으로 나선 안성준 한국장애인개발원 환경정책기획팀장은 “정부는 꾸준히 장애인 복지정책을 수립·운영해왔다”며 “공공시설을 중심으로 편의시설 설치율이 1998년 47.4%에서 2023년 89.2%로 향상됐다”고 말했다.

질의 응답에서 대법관들은 정부 측에 질책 섞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오경미 대법관은 “20여년간 이런 상태가 유지됐다는 것은 (장애인들이) 그 장소에 갈 수 있어도 들어갈 수는 없었다는 뜻 아닌가. 그걸 쉽게 대체되는 권리라고 말하는 데 놀랐다”며 “소매점에 대한 권리가 활동지원이나 온라인 활동으로 쉽게 대체가 가능한 권리로 치환될 수는 없다”고 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법이 동등한 접근권을 보장하라고 했는데, 정부 주장대로 해도 5%대 접근성을 두고 (정부가) 시행령으로 우리가 할 바를 다했다고 주장하는 건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이날 공개변론을 마무리 한 후 조 대법관은 “오늘 변론에서 심리된 내용과 제출 자료를 참작해 신중하게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선고 기일은 추후 통지하기로 했다. 선고는 변론 종결 이후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의 최종토론을 거쳐 2~4개월 내에 이뤄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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